2021년 12월 07일
사람을 죽였다.
갑자기 그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도시 중심에서 멀지 않은 외곽에 새롭게 구입한 낡았지만 넓고 깨끗한 주택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구택이었지만 실내는 여느 현대식 집 못지않게 세련된 곳이었다.
나는 지금 살고 있는 원래의 집에서 지냈고 새로 산 그집엔 어머니가 계시게 했다.
몸이 편찮으신 어머니는 병원에서 주로 지내셨지만 입원 기간이 아닐 때에는 병원과 가까운 그곳에서 지내시게 했던것이다.
그런데 그곳은 내가 바로 사람을 죽인 곳이다.
장소는 주택의 지하였다.
우발적이긴 했으나 나는 분명 그곳에서 한 '사람'을 죽였고 상자에 넣어 아무도 모르게 시체를 처리했다.
병원에서 나온 어머니가 그 집에 가기 하루 전쯤 나는 비워두었던 집의 치안이 걱정이 되어 그 집을 방문했고 이웃에게서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다.
두 번 정도 낯선 사람이 그 집에 찾아와 현관 도어록의 비밀번호를 물어보았다고 했다.
나와는 친척지간이라고 하여 이웃은 선뜻 비밀번호를 가르쳐 주려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모른다고 답했다고 한다.
이웃은 주택의 비밀번호를 알고 있었다.
내가 어머니의 입원기간 중 집이 비워졌을 때 가끔씩의 청소와 관리를 부탁해 놓았기 때문이다.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나의 친척이라고 거짓말을 한 그 낯선 사람은 누구이며 혹시 몰래 찾아와 비밀번호를 벌써 알아내지 않았을까 ?
내일 당장이라도 비밀번호를 다시 바꿔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숨겨왔던 어두운 기억이 돌아왔다.
사람을 죽인 기억이.
나는 그 사실을 지금껏 숨기고 있었다.
아니 숨기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만일 그 사실을 알렸다면 나는 지금의 일상과 평화를 누리지 못할 테니.
세상 아무도 몰랐다.
죽은 사람은 실종처리되었고 나는 정말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시체를 상자에 넣어 처리했었다.
그렇지만 딱 한 사람만은 그 어둡고 더럽고 추악한 비밀을 알고 있었다.
바로 '나'이다.
내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이상 난 사람을 죽였다는 그 사실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
가슴 한쪽이 갑자기 무거워지며 끝없는 우울의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무섭고 두려웠다.
세상 모두는 평화롭지만 그 비밀을 알고 있는 오직 '나'만 아무도 모르게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곳에서 홀로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누구에게 알릴 수도 없다.
나는 그 사람을 왜 죽였을까?
아니, 정말 내가 사람을 죽였나?
그렇다면 왜 지금까지 그 사실을 잊고 있었을까?
이런 의문이 들었다.
어쩌면 사람을 죽였다는 그 비밀을 너무도 꽁꽁 숨기려 했기에 나 자신마저도 그 사실을 깜빡 잊고 있고 있었나 보다.
그러다 낮선이 가 우리 집 근처를 서성인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불현듯 기억 속 저 밑바닥에 숨겨두었던 그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는지 몰랐다.
그렇지만 사람을 죽여놓고 나는 지금까지 어쩌면 이렇게도 뻔뻔스럽게 일상을 누리며 살고 있었던 건가?
그러다 다시 의문이 들었다.
'내가 정말 사람을 죽였나?'
'내가 그 정도의 악인은 아니지 않나?'
'부끄러운 비밀 몇 가지 정도는 가지고 있지만 사람을 죽인다는 건 차원이 달라도 너무 다른 문제지 않나?
정신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었다.
잠에서 깨고 있는 중이었던 것이다.
잠에서 조금씩 깨어나면서도 나는 계속 내가 사람을 정말 죽였는지 기억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였다.
잠이 너무 왔다.
잠에서 깨기가 도저히 싫었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죽였다는 기억과 확신에 사로잡혀 다시 잠들기는 싫었다.
차에 두고 온 오렌지 주스가 생각이 났다.
냉장고에 있는 며칠 전 샀던 사과잼과 땅콩잼이 생각났다.
나는 일어나 사과잼을 먹고 차로 가서 오렌지 주스를 가져오기로 마음먹었다.
웃기는 일이지만 그런 사소한 거라도 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 일어나지 못할 만큼 잠이 너무 왔다.
그렇게 다시 잠 쪽으로 내 의식이 가버린다면 나는 계속 내가 사람을 죽였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사과잼과 오렌지 주스와 사람을 죽였다는 기억의 확인을 위해 나는 억지로 억지로 잠에서 깨어났다.
잠에서 깨긴 했지만 아직 잠이 상당히 남아있는 상태로 힘들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아직 의식이 완전히 잠에서 돌아오진 않았다.
쏟아지는 잠 속에 비몽사몽 냉장고로 가서 사과잼과 땅콩잼을 한 스푼씩 퍼먹었다.
의식이 조금씩 잠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새벽 4시였다.
잠든 지 2시간이 지난 것이다.
이러니 이렇게 잠이 더디게 깰 수밖에.
이제는 오렌지 주스를 가지러 갈 차례이다.
나는 잠이 덜 깬 상태로 옷을 챙겨 입고 오렌지 주스를 챙기러 바깥으로 나갔다.
정신이 돌아오면서 내가 사람을 죽였다는 확신이 들었던 기억은 그저 꿈일 뿐이었다는 걸 서서히 깨달아갔다.
나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아니 죽인 적도 없었고 앞으로도 기어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왜 그런 꿈을 꾼 것일까?
사실 지금도 조금은 혼란스럽다.
비록 꿈 속이긴 하지만 한치의 의심 없이 내가 사람을 죽였다는 생각이 확신처럼 마음에 남아있어 내가 정말 그런 짓을 했을까 하는 의문이 아직 조금 남아있다.
그렇지만 내 기억 구석구석을 아무리 뒤져보아도 내가 사람을 죽인 기억은 없다.
그러나 찝찝함은 남아있다.
왜 그런 꿈을 꾸었을까 생각하니 몸에서 소름이 돋아난다.
나도 모르게 마음속에 쌓이고 쌓인 죄책감들 때문일까?
최근 들어 운전을 자주 하며 사고가 나지 않으려 신경을 잔뜩 썼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냥 악몽일 뿐인가?
그저 악몽이라도 꿈속에서 느꼈던 그 죄책감과 두려움은 아직 남아있다.
나는 결코 그런 짓을 한 적이 없는데도 한 번 느꼈던 그 어둡고 찝찝한 감정은 내가 실제 사람을 죽인 것과는 별개로 아직까지 가슴에 남아있다.
행동과 말들은 돌이킬 수가 없다.
누군가가 모른다고 하더라도 자신까지는 모르게 할 수 없다.
생각과 말과 행동들을 좀 더 신중히 해야겠다.
되도록 밝은 마음을 유지하려고 해야겠다.
의미 없는 말들과 자학적인 소모를 그만해야겠다.
이미 지나간 일들을 돌이킬 순 없지만 앞으로의 일들에 대해선 조금씩 좋게 바뀌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자기 전 간단한 기도라도 해야 할까?
다시 잠들러 가봐야겠다.
몇 시간 자지는 못하겠지만 부디 꿈 없이 잘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