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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양현 Dec 28. 2017

개인주의자의 창업

달콤하기도 씁쓸하기도 했던 7년 동안의 소기업 창업일기

개인주의자로서의 커밍아웃

오늘도 지난주에 이어 내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내가 어떤 성향인지, 내 캐릭터가 어떻게 창업으로 이어졌는지에 대한 고백이다. 일종의 커밍아웃인 셈이다. 내 가치관과도 관계가 있기 때문에 다소 어려운 내용도 포함될 것 같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하기 위해 사상이 어떠니 철학자가 누구니 하면서 개똥철학 같은 썰도 풀 예정이다.


창업을 준비하는 이들은 창업에 앞서 내가 과연 리더십을 발휘하여 회사를 운영할 수 있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한 번쯤은 진지하게 고민하게 마련이다. 보통 벤처기업의 창업자라 하면 애플의 스티브 잡스나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처럼 엄청난 비전과 불굴의 투지를 동시에 가진 혁신가를 연상한다. 만나는 모든 이를 형님 동생으로 만들 수 있는 타고난 친화력과 넉살로 무장한 영업의 신이 창업에 적합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안타깝게도 아니 당연하게도 나는 그 정도의 위인이 되기에는 턱없이 모자란다.     


창업 초기, 회사소개서라는 것을 난생처음 썼을 때와 다른 이들에게 회사를 소개할 때 난감해한 경험이 있다. 회사의 비전을 그럴싸하게 포장해야 하는데 딱히 떠오르는 단어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창업의 이유를 설명할 기회가 있으면 이렇게 말한다. 컴퓨터 공학자 애드 캣멀, 애니메이션 감독 존 래스터, 천재적인 경영자 잡스가 합심해서 만든 픽사 처럼 다양한 영역과 분야가 창의적으로 융합된 혁신적인 콘텐츠 회사를 꿈꾼다고 말이다. 그러나 이 답변이 나 스스로에게 회사를 꾸려나가는 데 그다지 동기를 유발하지 않기에 회사를 꾸며내기 위한 일종의 포장지에 불과하다는 것도 고백하고자 한다.     


바꾸어 말하면 나처럼 창업동기가 부족한 사람도 충분히 창업을 할 수 있다. 나 같은 사람도 그럭저럭 밥먹고사는데까지는 회사를 간신히 꾸려나갈 수 있으니 창업에 적합한 맞춤 캐릭터는 사실 없다고 감히 주장해본다. 당연히 이 글을 읽는 여러분 모두도 각자의 장점과 능력을 발휘하여 창업을 할 수 있다.     


이쪽도 저쪽도 아닌 회색분자?

그래도 뭔가 이유가 있으니까 창업을 하고 7년 동안 밥을 먹고 산 게 아니냐고? 그렇다면 지금부터 식자 놀이를 하며 장황한 답변을 좀 해보겠다. 아무 연관성이 없는 대학들을 갈지자로 건너 다녔던 것처럼 어릴 적부터 나는 정확한 포지셔닝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가령 친구 두 사람이 싸우고 있으면 싸움 한복판에 들어가 한쪽 편을 드는 게 정상이건만 한 발짝 떨어져 두 사람이 어떤 주장을 하는지 팔짱을 끼고 꼼꼼히 들여다보는 버릇이 있었다. 대학에 입학하면서는 다수가 아닌 소수의 입장에 서는 쪽으로 스탠스가 바뀌곤 했다. 특히 선거나 정치 같은 이슈에 대해 토론을 하게 되면 대부분은 젊고 팔팔한 대학생답게 다들 진보적인 시각에서 논지를 던지곤 하는데 나는 웬일인지 또래들의 이야기에 100% 수긍한 적이 없었다. 반대로 친가나 외가의 나이가 지긋한 집안 어른들은 명절 때 다 같이 만나면 다분히 보수적인 입장에서 정치 화제를 논했는데 그 이야기에도 별로 심적인 동조가 되지 않았다. 물론 어린 나이에 주제넘게 나설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속으로만 “이건 아니지 않나요?”하며 몇 번이고 되묻곤 했다.      


처음엔 나의 이런 괴상한 심리가 그냥 청개구리 같은 심보라고 생각했다. 요새 말로 특이한 취향을 일부러 찾고 튀어보려는 힙스터라고 해야 하나? 그런데 해가 갈수록 나의 이런 성향이 수그러들지 않고 심해져만 갔다. 이 사회에서 나의 포지션은 박쥐 같은 회색분자인가?라고 자조도 했었다. 사회의 대다수 구성원이 정치적으로 중도의 입장에 있다는 것을 알고 나도 그 부류에 있는 건가 착각도 했었다.(사실 중도와 개인주의는 전혀 다른 의미다)     


전공이 영화였기 때문에 영화계를 비롯한 문화예술 쪽의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이들의 성향은 대부분 내추럴 본 진보거나 거기서 더 나아가 저 멀리 왼쪽 끝까지 가버린 이들이 대부분인데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이들의 생각에 쉽게 동의를 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논쟁에 적극적으로 끼어들어서 좀 아는 체도 해보고 이겨도 봐야겠다 라고 생각하고 언젠가부터 사회과학 책을 잔뜩 사들여 탐독도 해보았다.


논쟁에 뛰어들어 특정 의견에 공감과 감정을 쉽게 주지 않는 나. 그렇다면 나는 과연 어떠한 상황에서 주로 화를 내고 분노하는지, 즉 감정을 표출하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봤다. 세상사나 타인에 대해서는 늘 심드렁했다. 주로 발끈하는 상황은 주로 내가 어떤 행위를 자유롭게 하려는데 누군가 못하게 막는다던지, 내 의사를 존중하지 않거나 설득을 구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다수의 논리에 의해 강제로 무언가를 시킬 때였던 것 같다. 특히 내가 동의하지도 않는데 나를 어떤 집단으로 묶고 그 안에서 수직관계를 강요하면 심적으로 매우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한 예로 서울예대를 다녔을 때의 일이다. 영화과의 특성상 카메라나 조명장비 같은 것을 많이 다루게 되는데 이런 장비들의 반출입 권한을 쥔 이를 기술 조교라고 부른다. 조교는 보통 과를 졸업한 선배가 맡게 된다. 조교는 촬영장비 반출입의 권한을 쥐고 있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매우 무섭고 어려운 존재로 인식된다. 하루는 조교가 학생들을 스튜디오에 불러 집합이란 것을 시켰다. 영화과는 후배들이 선배에게 늘 깍듯하게 태도를 가져야 하는데 요새 보니 후배들이 선배들에게 제대로 인사를 하지 않고 그래서 과가 잘 단합이 되지 않는다는 게 집합의 요지이자 모두말씀이었다. 과 동기들은 엎드려뻗치기를 한 상황에서 조교의 모두말씀을 들었다. 모두말씀이 끝나면 보통 과대표부터 빠따로 체벌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그날 기술조교는 체벌에 앞서 무슨 생각이었는지 지금 상황에서 동의하지 않는 이가 있으면 나가도 좋다고 말했다. 그러자 다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사이 나는 무슨 깜냥이었는지 주저하지 않고 문을 열고 1번 타자로 휑하니 나가버렸다. 집단 문화에 강한 거부감이 나도 모르게 행동으로 표출된 것이다. 그 후로 나는 촬영장비를 빌리는 게 쉽지 않았고 군대 입대를 핑계 삼아 휴학을 해버렸다.


개인주의자이자 자유주의자의 고백

나에 대한 되물음을 통해 내가 남들과 달리 유독 개인주의가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개인주의라는 것이 자유주의라는 범주에 들어있다는 것도 파악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한국에서 소위 자유주의자라고 지칭하는 고종석, 진중권, 복거일, 민경국 같은 지식인들이 쓴 글도 읽어보았고 이들의 주장을 유심히 살펴보기도 했다. (물론 이들은 자유주의 안에서도 포지션이 매우 다르다) 최근엔 문유석 판사가 쓴 <개인주의자 선언>이라는 책을 매우 재미있게 읽었다. 특히 저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고백하는 내용에 상당한 동감을 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 가면 왠지 불편하고 그리 즐겁지 않았는데 반면 문화예술을 좋아하는 소모임을 즐기고 혼자 글 쓰는 것을 행복해한다는 것을 털어놓는 내용에서는 “딱 나네”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 아내는 내가 그런 성향의 사람이 된 것이 너무 오랫동안 혼자 자취를 하면서 천둥벌거숭이로 지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내가 개인주의자라서 그런다고 이유를 붙이면 되려 지독한 이기주의자라고 놀린다.     


개인을 희생하고 집단과 대의에는 무조건 동참을 해야 한다는 생각, 내 생각이 무조건 옳고 남의 생각은 틀리다 라는 사고를 조장하는 사회에 나이를 먹어가면서도 쉽사리 마음을 열지 못했다. 많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한국은 아직까지 다양한 의견들의 발생을 그 자체로 인정하려는 다원주의 사회와 거리가 멀다. 되려 어느 한쪽으로의 확증편향이 매우 심하고 이로 인한 대립과 갈등이 수시로 유발되는 사회다. 유교문화에 기반한 남성중심주의, 가부장제, 식민지 시절 일본을 통해 이식된 집단주의 같은 폐해들도 죽지 않고 버젓이 살아있다. 내가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한국사회에서 사고와 행동을 제약하는 상황들을 더 마주하게 되면서 개인주의 성향을 더 키워갔는지도 모르겠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나의 이 극성스러운 개인주의는 사상적으로는 자유주의의 범주 안에 들어간다. 인식의 틀 안에서 큰 무리가 없다면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는 동일어로도 인식될 수 있다. 영국의 계몽주의자들인 홉스와 로크는 자유주의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아려면 국가체제가 아직 수립되지 않은 상황. 즉 원시사회를 가정해봐야 한다고 말한다. 원시사회에서는 아직 국가라는 것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당연히 법과 도덕 체계, 사회적인 안정망 등의 시스템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개똥이가 옆에 살던 말똥이의 움막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습격해 음식을 약탈하고 아내와 딸을 겁탈해도 죄 자체가 성립되지도 않을뿐더러 어디 가서 하소연을 할 수도 없다.


당연히 원시사회에서는 개인이 온전하게 자유를 지키는 것이 매우 힘들고 버겁다. 그러나 현대의 국가와 사회는 우리가 자유를 지키기 위해 해야 할 수만 가지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기 위한 목적으로 법이나 도덕 체계 같은 것을 만들어놓았다. 우리는 스스로와 가족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국가에 의탁하고, 대신 국가의 구성원으로 소속되는 것을 묵시적으로 인정하는 이른바 사회계약을 통해 자유주의라는 것을 정교화했다. 현대의 국가와 사회는 개인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법적, 물적 토대를 마련해놓고 있으며 우리는 그러한 장치들의 혜택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개인과 국가 간에 맺은 이 암묵적인 사회계약의 고도화가 아직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국가 자체 혹은 사회에 의해 종종 개인을 침해하고 자유를 억업하는 행위들이 교묘하게 자행된다. 우리는 지난 1년 동안 최순실의 국정농단 사태라는 엄청난 사건을 경험했다. 그런데 정작 내가 더욱 분노한 것은 은밀히 블랙리스트를 작성하거나 인터넷 댓글 조작을 통해 집권층과 성향이 다른 특정인을 일방적으로 배제하고 억업한 일이다. 국가의 권력이 개인의 사고 기제와 행동방식을 교묘히 억압해버리면서 그것이 결국 인격살인으로 귀결되어버린 상황을 우리는 지금 여실히 목격하고 있다. 적어도 내 관점에서는 특정인 일부가 국정농단을 통해 사익을 취한 것보다 국가가 은밀하고 정교하게 공권력을 이용해서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고 침해한 상황이 훨씬 더 극악한 중범죄라고 생각한다. 자유주의 관점에서 비춰보건대 개인이 자유롭게 행동하고 사고할 수 있는 상황을 국가가 억압했기 때문에 사회계약을 심대하게 위반한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이 주로 인용하는 하이에크나 프리드먼 식의 신자유주의 이른바 시장우선론적인 사고체계 안에서도 국가의 개인에 대한 개입과 통제는 전체 시장의 활력과 효율성을 떨어뜨려 궁극적으로 개인의 자유주의를 말살하는 극악한 행위다. 그렇기에 나 같은 자유주의자는 공권력이 투명하지 못한 한국사회를 위태롭게 바라보면서 동시에 내 자유가 지금 지켜지고 있는지 수시로 확인할 수밖에 없다. 원시사회의 자연인처럼 어느 틈에 침해당할지도 모르는 내 소중한 자유를 위해 밤이고 낮이고 눈을 부릅뜨는 부엉이 신세를 짊어져야 하는 것이다.     


자유주의자가 목숨 걸고 지켜야 할 것, 자존감

더불어 자유주의자가 사회 속에서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것은 자유를 느끼게 하는 심적인 원천이라 할 수 있는 자존감의 확보다. 자존심은 어떤 위계질서 안에서 자신의 위치와 상황을 사수하려는 본능이라면 자존감은 말 그대로 자신을 존중하고 소중히 하려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자유주의자는 자존심이 가끔 짓밟혀도 이내 잊고 훌훌 털어버리지만 자존감만큼은 시종일관 목숨 걸고 사수하려 한다. 사실 세상사는 당연히 자존심을 굽히고 살아야 하는 일이 다반사다. 나도 회사를 운영하면서 갑일 수밖에 없는 클라이언트들에게 자존심을 굽히는 일들이 부지기수로 발생한다. 그러나 그런 상황들이 자존감의 훼손으로 바로 연결되지는 않았기에 곧 털어버리고 일을 이어가곤 했다.     


그런데 대다수가 돈을 벌기 위해 다니는 한국의 직장에서는 자존감을 유지할 수 있는 상황과 시간들이 많지는 않은 것 같다. 자존감은, 개인이 스스로 알아서 일을 할 수 있는 환경인지 아니면 누군가 시켜서 억압적으로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인지에 따라 본능적으로 예민하게 반응한다. 한번 헤아려보자. 내가 일터에 나가서 하루 8시간의 노동을 하는데 누군가가 일을 수동적으로 시키거나 혹은 일을 해야만 하는 상황을 강요당하지 않고 직접 스스로 일을 찾아서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시간이 과연 얼마나 되는지를. 지구 상에 마지막 남은 직장인의 천국이라는 구글이 근무시간의 20%를 현재 맡고 있는 업무와 상관없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책정한 회사 정책도 역설적으로는 나머지 80%의 시간이 누군가 시켜서 할당된 일을 해야만 하는 강제적인 시간이란 것을 의미한다.     


구글도 이런데 하물며 삼성전자 같은 한국의 대기업은 어떨까? 수만에 육박하는 직원들 속에서 주체적으로 일을 하는 상황을 만들면서 자존감을 지킬 수 있는 이들은 아마 사장, 회장 정도의 타이틀을 단 극소수일 것이다. 전문경영인 체제나 평등문화가 발달하지 못하고 강력한 오너십의 권위 아래에서 움직이는 경우가 많은 한국의 기업 전통 속에서 자존감을 보호할 수 있는 직원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 사마천이 쓴 사기의 화식열전에는 상대방의 재산이 열 배 많으면 몸을 낮추고, 만 배 많으면 그의 하인이 된다고 했다. 이 말은 2천년이 지난 지금도 통용된다. 월급을 미끼로 육체를 타인에게 저당 잡힌 자에게 자존감이 온전히 보존될 수 있을까? 기업을 굴러가게 하는 작은 톱니바퀴 신세를 면하지 못하는 원 오브 뎀(One of Them)이 되어버린 대기업 직원들의 자존감은 날마다 길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질 수밖에 없다.  

   

머지않아 백세시대가 도래한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 우리에게 시간은 그다지 많지 않다. 정말 많지 않다. 잠깐 한숨 잔 거 같은 기분인데 우리는 이미 찬란했던 20대 청춘이 지나고 어느덧 장년이 되어버렸다. 직장인의 상당수는 회사에 다니는 동안 수동적인 상태에서 벗어나 아랫사람에게 지시를 내릴 수 있는 위치로 올라가기 위한 임원별 달기 커리어에 많은 시간을 소비할 것이다. 그런데 임원별을 달기 위해 월화수목금금금 철야근무를 하는 동안에, 윗사람에게 굽실대고 같은 직급의 사람들과 아웅다웅하는 순간에, 진정 소중한 시간들은 가차 없이 휘발된다. 나 자신을 위한 시간들, 가족과의 소중한 추억을 쌓을 수 있는 시간들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뒤늦게나마 깨달은 순간에는 시간은 이미 흘러버릴 때로 흘러버려서 어느덧 머리가 반백이 되고 은퇴시점은 코앞에 와있을 것이다.     


중고등학생 때는 엄마에게 떠밀려 사교육학원을 오가고, 막상 대학에 가서는 취직 걱정에 스펙을 쌓는 데 골몰했다. 취직을 했더니 이번엔 자신의 의지가 아닌 윗사람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일상이 다반사다. 한평생, 남의 생각을 대신 이행하고 삶도 대신 살아주었다. 타인의 의지에 지배당해 바둥대며 살다가 어느덧 정신을 차려보니 노인이 되어버렸다? 아이고 생각만 해도 정말 끔찍한 삶이다.     


한국사회에서 그나마 자존감을 온전히 지키면서 살 수 있는 직업들이 몇 개 있다. 우선 작가와 예술가가 첫 손에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스스로 창작물을 만들며 주체적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타인이나 사회에 지배당하는 삶과는 무관하다. 물론 창작과 수입이 비례하지 않으면 자존감은 끊임없이 요동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에서 자존감을 회복하는데 필요한 문제 해결의 답은 외부가 아니라 본인에게 있는 것이다. 농부도 마찬가지다. 농부는 4계절과 1년의 스케줄을 능동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새벽같이 일어나 농작물을 재배하고 때가 되면 수확해서 돈을 번다. 농부가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은 오직 자연뿐이다. 옛사람들이 농자천하지대본이라고 한 말이 틀린 말이 아니다.     


지식인 가운데는 판사, 대학교수 같은 직업 들도 자존감을 대체로 유지할 수 있는 직업이다. 법원이라는 관료체제가 있지만 외부의 간섭 없이 독립적인 주체로 사건을 도맡아 평결을 하는 업무의 특성상 판사는 공직사회에서 그나마 자존감을 보존할 수 있는 직업이다. 반대로 똑같은 법조인이라 하더라도 한국의 검사는 마피아와 유사한 상명하복 기반의 집단주의와 정치권력의 외풍에 갈대처럼 흔들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존감을 온전히 지킬 수 없다. 교수도 마음만 먹으면 자존감을 유지할 수 있다. 대학개혁이 가속화되면서 논문, 졸업생 취업률 등의 실적으로 인해 신분 자체가 위태로운 교수들도 부지기수지만 적어도 정년보장, 이른바 테뉴어를 받은 이후의 교수는 자신의 삶을 외풍에 흔들리지 않고 주체적으로 존속, 유지시킬 수 있다. 실제로 테뉴어 제도는 지식사회의 대표주자인 교수가 외압에 흔들리지 않고 자유롭게 의사표현과 행동을 하라는 의도로 미국에서 고안된 것이다.     


자존감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는 한 가지 방법,
개인주의자로서의 나를 지킬 수 있는 기회
창업

스스로 창업을 해서 회사를 꾸려나가는 창업자도 그나마 자존감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는 이 땅의 선택받은 소수라고 생각한다. 창업자는 사무실에 앉아있는 모든 시간을 자신의 의지대로 쓴다. 사업에 관한 대부분의 과정을 자신의 의지대로 결정하고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진다. 소설 <물의 가족>으로 유명한 소설가 마루야마 겐지가 개인의 사육장에 불과한 회사의 본질을 꼬집으며 자영업을 하며 살아가라고 일갈한 것도 자유의 본질인 주체적인 삶을 직장이란 곳이 보장할 수 없기에 그런 것이다. 나도 회사의 본질을 깨닫고 내 소중한 시간을 다른 사람에게 내주지 않기 위해 그리고 자존감을 유지시키기 위해 소기업 창업에 내 짧은 인생을 베팅했다.


그럼 나만 혼자 잘먹고 잘살려고 창업을 한 것이냐고? 희한하게도 내 자유를 온전하게 존속시키려면 자유로운 경쟁 속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에 대해 불편하게 생각해야만 한다. 모두가 만족하는 완벽한 자유주의는 이상적으로만 존재하고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유를 추구하는 과정 속에서 우리의 타고난 본성인 이기심이 발동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본래 동물이기에 자신이 가장 편한대로 움직이려는, 말 그대로 이기적인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다양한 사람들의 이기심이 발현되는 과정 속에서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이 발생하고 그 와중에 소외되는 이들이 생긴다. 자유주의자는 이러한 결과들이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부작용으로 인식해야 하고 이런 상황이 심각하면 우리는 다양한 연대를 통해 우리와 계약을 맺은 국가를 호출해야 한다.     


우리에게 호출당한 국가는 어떻게 해야 할까? 국가는 단순히 야경국가로서의 역할에 머물지 않고 호루라기를 불어 게임을 멈추고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의 상황을 교정해야 한다. 마이클 센델의 스승으로 유명한 미국의 정치철학자인 롤스는 진정한 자유가 이룩되려면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정의의 원칙을 세우는 일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진정한 자유의 추구는 사회의 자연스러운 작동원리에만 맡길 수 없으며 모든 편견을 배제한 원초적인 위치에서 상황을 다시 판단할 수 있는 정의라는 것을 개입시켜 사회를 재조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논리에 의하면 현대의 사회에서 발생한 다양한 불평등은 자유의 수혜를 덜 입은 자들을 발생시키며 그렇기에 그들에게 모자란 자유를 추가적으로 제공하려면 그 불평등을 보상받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당연히 자유를 추구하는 과정과 경쟁 속에서 소외된 이들에 국가와 사회가 나서서 다양한 지원을 통해 이들에게 자유를 제공해야만 한다. 롤스의 이상과 달리 자유를 극단적으로 드라이브한 미국인과 자유를 쟁취하는 과정 속에서 발행한 부작용들을 시정하기 위해 수시로 게임을 멈추고 뛰어드는 서유럽인 가운데 누가 더 행복감과 삶의 만족을 누리면서 살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자유주의의 진정한 과정이 무엇인지는 자명해 보인다.      


대한민국 사회는 진정한 자유를 위해 얼마만큼 나아갔을까? 이 땅의 평범한 이들이 자유를 지키며 온전하게 살아가기에는 너무나도 장애물이 많다. 나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위대한 비전을 좇기 위해, 혹은 엄청난 돈을 벌기 위해 창업을 한 게 아니다. 개인주의자로의 나를 지킬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으로 창업을 선택한 것이다. 소기업의 하루하루는 곡선과 급속구간으로 가득한 롤러코스터를 탄 것과 비슷한 아찔한 스릴의 연속이다. 역설적으로 그런 상황들이 내 소중한 자존감을 단련하는 시간이라고 여기면서 나는 살고 있다. 창업자의 일상은 자존감을 지키기 위한 싸움의 연속이다. 그러나 그것이 지금까지 나를 창업하게 하고 나를 지금까지 지탱하게 한 내적 동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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