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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양현 Dec 14. 2017

파란오이라는 회사의 정체

달콤하기도 씁쓸하기도 했던 7년 동안의 소기업 창업일기

딸에게 대충 이야기는 들었다만
자네가 하는 일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3년 전 여자친구의 아버님을 처음 뵈었을 때의 상황이다. 현재 두 분의 신분은 아내와 장인어른으로 바뀌었다. 여자친구와 결혼을 염두하고 교제를 하고 있었기에 나와의 첫 만남에서 아버님은 이렇게 물으셨다.       

   

“그래. 딸에게 대충 이야기는 들었다만 자네가 하는 일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잠깐 호흡을 가다듬고 대답을 찾았다.


“저는 삼성전자에 다닙니다... 은행에서 7년 차 과장이라고 일하고 있습니다... 무슨 공사에 다닙니다...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방송국에서 PD로 있습니다... 영화제작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어디어디 연구소의 연구원입니다... 아니면 하다못해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앱을 만드는 조그만 벤처회사에 다닙니다...”


이렇게 대답할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사실 이렇게 딱딱 떨어지게 설명을 해야 말하는 이도 수월하고 듣는 이도 시원하다. 이러쿵저러쿵 본인이 하는 일을 똑 부러지게 이해시키지 못하고 주저리주저리 설명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사기꾼으로 의심받기 십상이다. 그래도 내가 하는 일을 최대한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것이 점수를 따는 데 유리하건만 주변머리가 좋지 않은 나는 이렇게 대답을 해버렸다.      

    

“영상콘텐츠를 만드는 회사를 직접 창업해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만드는 콘텐츠를 실감미디어라고도 부릅니다.”

          

아버님은 내 이야기를 열심히 귀에 담고 계셨지만 한 번에 이해를 하시진 못한 것 같았다. 내가 생각해도 알쏭달쏭한 답변이기에 다시 부연설명을 드렸다.           


“영화 아바타 보셨지요? 안경 쓰고 보면 막 영상이 튀어나오는 그런 걸 3D라고 합니다. 이런 신기술이 들어가는 영상을 만들기도 하고 기술도 개발하는 조그만 회사를 직접 운영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누구에게 내 회사 파란오이를 소개하려면 이렇게 구구절절 설명해야 한다. 그럼 이번엔 정말 문어 투로 장황하게 이야기해보겠다. 타인에게 내 회사를 그럴싸하게 포장해야 하면 나는 이렇게 말하곤 한다.   

        

“첨단영상기술을 도입해서 사람들이 훨씬 더 영상을 몰입하게 하는 것을 실감미디어라고 부르는데요. 파란오이는 실감미디어 기반의 디지털 콘텐츠를 만드는 벤처기업입니다.”          


여기서 한술 더 뜨면           


“박근혜 정부 때는 창조경제라고 해서 주요 지원분야 중 하나였고요.. 지금 문재인 정부에서는 4차 산업혁명이라고 하죠. 파란오이에서 제작하는 콘텐츠들은 4차 산업혁명을 구현하는 핵심분야 중에 하나입니다...”

    

뭐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이 시점에서도 "그래서 도대체 파란오이라는 회사가 정확하게 하는 일이 뭔데?" 이렇게 묻는 이들이 많을 것 같다.          


파란오이는 카메라로 촬영을 하거나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하거나 해서 영상을 만드는 일, 일종의 디지털 콘텐츠를 제작하는 회사다. 그런데 단순히 영상을 만드는 게 아니라 요새 이슈가 되고 있는 VR 가상현실, 3D 입체영상, UHD 초고해상도 영상 같은 새로운 기술을 적극적으로 이용해서 영상을 제작한다. 영상에 이런 기술들이 들어가면 사람들은 기존의 영상보다 훨씬 더 몰입을 해서 보게 된다.          


그럼 이런 영상은 어디서 활용할까?


첨단영상 기술이 들어간 영상들은 일단 박물관이나 전시관에 들어가는 콘텐츠로 활발히 쓰인다. 영상의 장르가 영화라면 극장에 걸리기도 하고, 다큐멘터리나 드라마라면 방송채널에도 틀 수도 있다. 실제로 파란오이에서 3D 입체영상기술과 UHD 초고해상도 영상기술을 도입해 제작한 다큐멘터리 <우포늪의 사람들>과 2부작 드라마 <독도평전>은 공중파인 EBS에서 방영되었다. 최근 VR 기술로 만든 콘텐츠는 부산에 건립된 아세안 문화원, 한성백제박물관 등에서 전시 콘텐츠로 사용되었다.                                

파란오이에서 제작한 3D 입체영상, UHD 초고화질 기반의 다큐멘터리 <우포늪의 사람들>




창조경제, 4차 산업혁명의 본질?

여기서 잠깐 이야기를 삼천포로 빠뜨리겠다.


창조경제니, 4차 산업혁명이니 하는 낯 뜨거운 단어로 파란오이를 치장했지만 고백하건대 이런 키워드들은 원래 실체가 없다. 지금까지 창조를 필요로 하지 않은 시절이 있었나? 혁명이 아닌 때도 없었다. 증기기관이 발명되니 산업혁명이 오고, 컨베이어 벨트가 생기니 제조혁명이 왔다. 컴퓨터가 발명된 것도 일종의 혁명이다. 닐 암스트롱이 달에 착륙하니 우주혁명이 열리고, 인터넷이 전 세계로 뚫리면서 정보혁명이 왔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시점엔 벨 에포크라고 해서 엄청난 유토피아가 건설될 것처럼 사람들이 떠들었다. 현대에 와서는 엔트로피니.. 제3의 물결이니.. 특이점이니... 뉴 밀레니엄이니... 하면서 수시로 당장 어떤 큰 혁명적 변화가 올 것처럼 미래학자들이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2019 블레이너러너>가 묘사한 미래가 막상 현실로 다가오지는 않은 것처럼 세상은 그렇게 쉽게 빨리 진보하진 않는다.     


하지만 이 구호들이 꼭 불필요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정부는 구호를 앞세워 새로운 산업을 육성하고 키울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키워드들은 범정부차원에서 관련 사업을 지원하고 경기를 부양시키기 위한 선동 문구, 일종의 어젠다라고 보면 된다. 그래서 정부기관에서 일을 하는 공무원들은 남사스러워도 이런 구호를 쓸 수밖에 없다. 그러니 공무원들이 구호를 시도때도 없이 외쳐도 너무 조롱하거나 비웃지는 말자. 공무원도 아닌데 구호를 끊임없이 외치는 이들이 또 있기는 하다. 보통 이런 사람들은 그냥 정부기관에 줄을 대서 사람들을 도모해 무슨 협회 같은 것을 만들고 이를 이용해서 예산이나 타 먹으려는 이들이라고 보면 된다.      


벤처기업의 정의?

잠깐 이야기가 딴 길로 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겠다. 나는 파란오이를 소개할 때 "디지털 콘텐츠를 개발하는 일종의 벤처기업입니다"라는 문장을 입혀 부가설명을 하기도 한다. 벤처기업이라고 하면 회사가 뭔가 있어 보이는 느낌이 들기도 하니까 말이다. 최근 중소벤처기업부도 생기고 벤처기업의 화려한 성공사례들이 언론 지상에 노출되기 때문에 많은 이들에게 '벤처'라는 어감이 좋게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벤처기업이라 하면 흔히 IT나 첨단기술 같은 것을 개발하는 회사라고 일반인들이 연상한다. 그 기준에서 본다면 파란오이는 기술 관련 특허도 보유하고 있고 필요에 따라서 기술개발도 가끔 진행하니 사람들이 생각하는 벤처기업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IT 기술을 개발한다고 해서 다 벤처기업은 아니고, 사실 공식적인 인증을 받아야만 벤처기업이라는 타이틀을 얻을 수 있다. 겉보기에 그럴싸한 IT 관련 기업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모두가 벤처기업은 아닌 것이다. 벤처기업 인증을 받는 방법이 몇 가지가 있다. 우선 VC 즉 벤처캐피털 같은 기관 투자를 받는 과정을 진행하면서 인증을 받을 수 있다. 둘째 기업부설연구소를 세우고  매출액 대비 일정 비율의 연구개발비를 사용한 비율을 증빙하는 방법도 있다. 셋째 기술보증기금의 심사를 거쳐 승인을 받는 방법이 있겠다. 벤처기업 인증에 필요한 요건은 아래 <벤처인>이라는 사이트에 가면 확인할 수 있다.      

http://www.venturein.or.kr                           


그중 파란오이는 기술보증기금을 통해 공식으로 벤처회사 인증을 받았기 때문에 실제로도 벤처기업이다. 하지만 내가 이러쿵저러쿵 회사에 대해 자세하게 이야기해도 대부분 곧바로 알아듣지 못한다. 그래서 단순하게 대충 영상 프로덕션 같은 일을 한다고 얼버무리고 자포자기하는 경우도 많았다.  




시류에 따라 요동치는 파란오이의 생존기

이번엔 잠자고 나면 판이 바뀌곤 하는 한국의 디지털 콘텐츠 산업 트렌드에 파란오이가 합류한 후 지금까지 어떻게 생존해왔는지를 조금 소개해보겠다. 2011년 겨울 무렵이다. 같이 일을 할 동업자 구하기, 자본금 모으기, 사무실 얻기, 법인 세우기, 등기부등본 떼기, 세무서에 가서 사업자등록증 발급받기, 세무기장을 대리해줄 세무사 찾기 등등 기업을 세우기 위해 필요한 실무적인 통과의례를 겪고 드디어 처음으로 세금계산서를 발행했다. 매입처는 감개무량하게도 대기업 계열사인 CJ 파워캐스트. 세금계산서를 발행했다는 것은 첫 매출 즉 처음으로 일감을 얻었음을 의미한다. 그만큼 스타트업에게 첫 세금계산서 발행은 아주 신성하고 감개무량한 일이다. 


첫 일감은 해를 넘겨 2012년 봄까지 계속되었다. 영화진흥위원회에서 기획한 <3D 입체영화의 제작과 관람에 관한 휴먼팩터 연구>라는 프로젝트에 필요한 실험자극물이라는 것을 제작하는 일이었는데, CJ 파워캐스트에서 일감을 위탁받아 사무실에서 밤을 새 가며 열심히 작업을 했다. 실험자극물이라고 하는 것은 스토리가 있는 영화 같은 것은 아니고 똑같은 내용을 촬영한 영상 안에 특정 변수를 단계별로 삽입하는 일종의 연구용 영상을 말한다. 우리가 안경을 맞출 때의 상황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우리가 검안기에 눈을 대고 있으면 시력을 측정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된 이미지들이 안경사의 조작을 통해 제시된다. 안경사는 우리 눈에 이미지들을 보여주면서 "어떤 글자로 보이시나요?" 하고 물을 것이고 우리는 이미지를 보고 옳거나 틀린 대답을 할 것이다. 우리 눈의 시력을 판별하기 위해 안경사가 보여주는 이런 이미지들도 일종의 실험자극물이라고 할 수 있다.      


실험자극물은 영화나 방송 프로그램처럼 창의적인 영상은 아니다. 하지만 실험의 엄밀성을 위해서 자극이라고 부르는 정확하고 체계적인 정량 변수들을 영상에 적용하는 까다로운 과정이 필요하다. 영상에 삽입된 자극들이 매우 정확해야만 실험 결과를 신뢰할 수 있는 것이다.            

                     

첫 일감으로 제작한 실험자극물의 일부다.

 

졸린 눈을 비벼가며 일하다가 잠시 한숨을 돌리고 웹서핑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잠이 확 달아나는 뉴스가 눈에 고정되었다. 나탈리, 7광구 등 3D 기술을 적용한 한국영화들이 연달아 실패하면서 한국의 3D 관련 산업이 비관적 일 수밖에 없다는 분석기사였다.          


“아니.. 회사 만든 지 1년도 안되었는데.. 나더러 회사 접으라는 건가...?”   


기사의 예측이 빗나가면 좋으련만 하루하루가 지나갈수록 나의 주특기이자 창업으로 이끌었던 3D는 빠르게 내리막길을 걷고 말았다.

  

2개도 힘든 데 이제 3개를 하라고?
 

더 이상 긴급 소생은 불가능해 보인 3D를 부여잡고 간신히 버티고 있던 2013년 어느 날, CGV에서 일을 하던 대학원 동기 형이 자신의 사무실로 나를 불렀다.          


“이런 거를 해보려고 해..”

“뭘요?”

“김지운 감독님하고 신기술이 적용된 단편영화를 하나 만들 거야. 카메라를 3대 써서 말이지....”

“그럼 극장 스크린도 3개라는 이야기인가요?”

“그렇지. 극장에 있는 스크린을 쓰고 좌우 벽면을 이용하는 거야. 이 기술을 <스크린 X>라고 부를 거야. 네가 3D 전문가니까 종종 이것저것 자문 좀 해줘..”

"헉!"          


속으로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2대도 힘들어 죽겠는데.. 이제 3대씩이나..”          


뭐 그렇지만 어쩌겠나. 새로운 기술이 또 나온다는데.... 3D도 이제 저무는데 먹고살려면 다른 뭐라도 배워야지... 2013년 어쩔 수 없이 2대도 아니고 3대나 카메라를 쓰는 스크린  X라는 기술을 그해 부랴부랴 배웠다.                                

3개의 이미지를 사용하는 기술인 스크린 X로 제작한 <귀신고래>


2개도 아니고 3개 아니고 이제는 9개...?

그해 여름의 일이다.  KAIST와 앤미디어라는 방송콘텐츠 제작사와 산학 컨소시엄을 맺은 후 한국콘텐츠진흥원이 펀드를 지원하는 연구개발과제의 전담기관으로 선정되어 일을 진행하게 되었다. 연구개발과제의 제목은 <다중카메라 기반 무안경식 다시점 3D 영상획득시스템 및 다시점 실감형 콘텐츠 제작기술 개발>이다. 쉽게 이야기하면, 기존의 3D 영상은 반드시 안경을 착용해야만 볼 수 있는 기술이었지만, 이 과제의 목표는 안경을 쓰지 않고 3D 영상을 구현한다는 것이다. 연구에 앞서 선행연구를 찾아봤고 먼저 기술을 개발한 경험이 있는 전문가를 만나 물었다.

     

“다시점영상은 보통 몇 개의 영상을 구현하나요?”

“무안경 디스플레이는 보통 나인뷰라고 해서 9개의 영상을 구현하는 것이 표준입니다.”

“그럼 실사 카메라로 촬영하는 영상도 그렇게 해야 하나요?”

“뭐 다른 방법도 있지만 일단은 그게 정석이겠죠?”

"헉.. 2대를 쓰는 3D 입체영상도 아니고. 스크린 X처럼 3대 아니고. 뭐 이젠.. 9대??”          


파란오이가 처음으로 국책연구개발 과제를 진행한다는 기쁨의 축배는 잠시였다. 나는 그날부터 무안경이 가능한 디스플레이와 카메라를 구입해 만지작거리고 관련 연구논문 등을 뒤져가며 2개도 아니고 3개도 아니고 무려 9개의 영상을 만드는 기술을 공부해야만 했다.                         

  

연구과제 진행 중에 9개 영상을 기반으로 무안경 3D 영상을 구현한 사례다


그렇게 낑낑대며 연구하다 보니 시간도 잘 흘러가서 어느덧 2014년을 맞이하였다. 이번엔 UHTV 시대의 포문을 열겠다며 시범방송 개국이니 콘텐츠 제작이니 기술개발 같은 것들을 정부가 적극 육성하기로 했다는 뉴스가 터져 나왔다.  


“HD도 힘들어 죽겠는데... 이제 해상도가 그 4배인 영상을 제작하라고?..”         

 

그렇지만 뭐 어쩔 수 있나. 정부가 포문을 열겠다니 나는 그 포문에 들어가는 탄알이 될 수밖에..       

 

2개... 3개... 9개.. 16개.... 눼눼. 알겠습니다요.
   

2015년 이번엔 ‘~을 적극 육성하겠다’라는 서술어는 놔두고 목적어만 살짝 바꾸었다. 해당 목적어는 '가상현실 기술'이었다. 그때는 정부의 반복된 수사패턴에 이골이 나서 이미 둔감해진 상황이었다. 사무실의 기술감독님에게 심드렁하게 물었다.      

     

“저 가상현실도 실사가 가능하겠죠?”

“대표님. 앞으로 저게 대세가 될 거 같아요. 우리도 빨리 기술테스트를 해야 할 거 같은데요.”

“가상현실이 원래 예전부터 있었던 기술이에요. 그때는 뭐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든 거고.. 저게 카메라로 촬영하면 보통 몇 대로 촬영하죠?”

“구글에서 개발한 구글 점프라는 게 있는데요. 고프로 카메라를 16대 연결해서 촬영하네요.”     

"네네.."     


이젠 뭐 어떤 기술이 나와도 좀처럼 놀라지 않는다.


2개... 3개... 9개... 16개...


해가 바뀌어갈 때마다 내가 다루어야 하는 이미지의 개수는 늘어나거나 혹은 해상도가 커져갔다. 당연히 파란오이가 제작 가능한 영상 기술들도 하나둘씩 차곡차곡 쌓여갔다. 3D 입체영상에서 출발해서 스크린 X 다면영상, 무안경 다시점 3D 영상, UHD 초고해상도 영상, 지금은 VR 가상현실까지 와버렸다.     



  

오직 별만을 보고 길을 나아가던 시대
안타깝게도 모든 것이 피동적으로 주어져야 하는 나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영상콘텐츠를 제작하는 회사 중에 이만큼 넓은 영상기술 포트폴리오를 가지고 있는 회사가 국내에 얼마나 될까? 단연컨대 파란오이처럼 실감미디어 분야의 핵심기술을 대부분 커버하는 회사는 국내에서 매우 희귀하다. 이쯤 되면 실감미디어 분야에서 파란오이가 방귀 깨나 뀌는 회사처럼 생각할 사람들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부끄럽지만 이건 자랑이 아니다. 고백하건대 파란오이는 시류에 영업하고 기술 트렌드를 쫓는 수많은 회사 중 하나일 뿐이다. 파란오이의 다양한 기술 포트폴리오는, 매년 삼성이나 LG 같은 가전사가 새로운 종류의 TV를 론칭하고 정부가 지원책을 발표하면 거기에 걸맞은 기술을 재빨리 요령껏 배워서 콘텐츠를 내놓는 팔로워가 되어버렸다는 반증이다.        

  

칼 세이건이 쓴 <코스모스>라는 책을 정말 좋아한다. 기독교인들이 심신이 심란할 때 성경을, 불자들이 천수경을 꺼내 읽는다면, 나는 가끔 머리가 복잡할 때 코스모스를 꺼내 들어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곤 했다. 책을 읽는 순간만큼은 신경안정제처럼 기분이 편안했다. 책 속에서 칼 세이건은 몇만 년, 몇억 년 단위 앞으로 벌어질 우주의 미래를 사색한다. 대학원에 다닐 무렵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최되는 전시용 영상을 만들기 위해 이란의 유명한 유적지이자 고대왕국 페르시아의 수도인 페르세폴리스를 간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만났던 고고학자들은 2천 년 전, 3천 년 전의 찬란했던 페르시아의 영화와 그 자취를 열심히 쫓고 있었다.          


이렇게 한 손엔 이성, 다른 한 손엔 신념이라는 작은 횃불을 들고, 아득하고 먼 곳에 있는 진리를 천천히 탐험하는 이들이 있다. 반면에, 한 치 앞도 분간을 못하고 거의 매년 주기로 바뀌어가는 이 기술과 시류를 불나방처럼 쫓는 나, 그리고 회사는 도대체 뭘까? 첨단영상 기술이 적용된 콘텐츠를 제작하고 기술을 개발하는 회사로 화려하게 비칠 순 있겠지만 조금 더 속내를 들여다보면 회사의 상황은 이렇게 궁색하기 짝이 없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국문학과를 다닐 무렵 문학비평을 공부할 때 배웠던 문학이론가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 첫 구절이다. 이 문장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기에 오직 별빛만을 의지하며 당당하게 나아가는 소설 속 주인공의 전형을 묘사한 것이다. 그런데 오직 별만을 보고 길을 나아가던 시대상황은.. 그 상황은, 안타깝게도 모든 것이 피동적으로 주어져야만 하는 파란오이에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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