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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양현 Dec 21. 2017

학벌 세탁의 전형

달콤하기도 씁쓸하기도 했던 7년 동안의 소기업 창업일기

너는 정말 이 시대 학벌 세탁의 전형이야!     

한 회사의 성격을 파악하려면 창업자가 어떤 이력을 거쳤는지, 성향은 무엇인지를 먼저 파악하는 것도 중요할 것 같다. 그래서 2주 동안 나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겠다.

    

오늘은 우선 창업을 하기 전에 거쳤던 내 이력을 소개하고자 한다.

다음 주 내용은 제목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내가 어떤 성향을 지니고 있는지, 나 자신과 주변, 혹은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은 무엇인지, 그러한 정체성이 창업으로 어떻게 발전했는지에 대해서도 고백하고자 한다. 

   

“너는 정말 이 시대 학벌 세탁의 전형이야!”     


내 소중한 취미 중 하나가 장거리 자전거 라이딩인데, 자전거 취미를 같이 했던 시니컬한 성격의 H형이 가끔 내 이력을 놀리기 위해서 던지는 멘트다.   

   

언젠가부터 한국사회에서 사람을 소개하는 전형적인 패턴이자 시대착오적인 언어습관 하나가 정착되었다. 본인 혹은 누군가를 소개할 때 “어디를 나온 누구...”라고 머리표를 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서울대 공대를 나온 누구야. 연대 상대를 나온 누구야"하는 식이다. 이 고리타분한 조어법으로 누군가에게 나를 이야기하면      


“저는 서울예술대학에서 영화를 공부했고 졸업 후엔 편입을 해서 중앙대에서 국문학을, KAIST 문화기술대학원이라는 곳에서 첨단 영상기술을 공부한 최양현이라고 합니다.”     


라고 말할 수 있겠다. 전문대에서 4년제 대학, 그것도 모자라 대학원까지 진학했기 때문에 정말로 가방끈을 주욱주욱 늘였다. 세속적인 기준에서 학교 레벨이란 것도 덩달아 높아져 갔기 때문에 H형이 실제로 나에게 학벌 세탁의 전형이라고 놀리는 것도 당연한 말씀이다. 물론 나는 H형이 일갈을 하면 보통 이렇게 대꾸한다.     


“에구에구 형. 그런 태도가 참 딱하다.... 책도 많이 읽었으면서 통섭 이런 거 몰라? 나는 인문, 예술, 공학을 아우르는 다학제형 공부를 한 거야. 그런 공부를 했기 때문에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융합형, 통섭형 인재가 된 거라고..”     


이제 내가 디지털 콘텐츠 분야의 벤처기업을 운영하는 대표로 확실한 변태를 했다고 착각을 했는지 가끔 IT 계 유명 벤처사업가처럼 시건방을 떠는 기색이 보이면 그 꼴이 마냥 우스운 아내는 이렇게 말한다.     


“오빠. 정신 차려. 근본이 딴따라 주제에 왜 벤처사업가 행세야.. 연극영화과 나온 딴따라면서..” 

(참고는 내 아내도 나처럼 연극영화과를 나온 사람이다) 

그래 나는 원래 영화감독을 꿈꾸던 사람이었지...
 

그렇다. 고백하면 나는 원래 고등학교 시절부터 영화감독을 꿈꾸던 사람이다. 꿈을 실현하기 위해 서울예술대학이란 곳에서 영화 연출을 공부했다. TV 속에 나오는 연예인들이 라디오스타 같은 예능프로에 나와 선후배 사이를 회상하며 학창 시절의 무용담을 이야기하던 그 학교다. 일반인들에게는 괴짜나 끼 많은 애들이 다니는 학교로 인식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그런 친구들이 많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정상적인 애들이 대부분이다. 연극영화과 계열의 학과는 보통 수십대 일의 엄청난 경쟁률에 육박하는데 그 속에서 나는 운 좋게 합격통지를 받고 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막상 입학을 하고 나서는 적응이 너무 힘들었다. 예체능 계열 특유의 선후배 간에 조성된 엄격한 질서와 집합 같은 군대문화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본래 뼛속부터 개인주의자, 자유주의자였을까? 나는 입학하자마자 고리타분한 선후배 위계문화에 학교를 겉돌면서 곧바로 자퇴와 재수를 생각했다. 그러나 사회에 맞춰 순응해가는 보통의 인간들처럼 나도 점차 학교의 분위기에 적응하기 시작했고 습작 영화들을 만드는 재미에 빠지면서 학교를 계속 다니게 되었다.  

   

대학시절 무렵의 남자는 모두 병역문제와 고민해야 한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운이 좋았던 건지 불운이었는지 몰라도 배우 장동건의 병역면제 사유라는 기흉이라는 병이 덜컥 신체검사에서 발견되면서 현역 복무가 아닌 보충역 즉 공익근무요원 근무 판정을 받았다. 기흉은 폐에 미세한 구멍이 생겨서 그 안으로 공기가 들어가 역으로 폐를 압박해 숨이 가빠지는 병이다. 주로 마르고 키가 큰 20대 초반의 남자에게 잘 발생하는데 신체조건이 딱 나였다.  당시 183cm 키에 70kg 근처의 몸무게였으니 말이다. 기흉에 걸리면 허파에 바람이 들어가니까 만날 웃는 거냐고 친구가 놀린 적이 있다. 비교적 가벼운 외과적 수술을 거치면 완치되는 병이라 한 30여 년 전에 만약 누군가가 이 병에 걸려 웃었다면 병역면제가 되었기 때문에 웃었을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지금은 아예 폐 양측에 기흉이 발생되지 않으면 현역을 가야 하니 누군가 이병에 걸려봤자 웃기는 커녕 서글프지 않을까?


공익근무요원은 평일 저녁 6시면 칼퇴근, 주말은 무조건 집에서 쉬는 일종의 공무원 신분이다. 이런 조건이 나에게 틈틈이 습작 영화를 창작할 수 있는 엄청난 기회를 제공했다. 남들은 군대 시절을 보통 어둠의 시기로 묘사하는데 나는 직접 만든 영화가 단편영화제가 나가 주목도 받고 영화잡지에 인터뷰도 하고 공모전에 나간 뮤직비디오가 상도 받으면서 반짝반짝 빛나던 시기였다. 


제대(공익근무요원 용 정식 용어는 소집해제) 후엔 다큐멘터리 <낮은 목소리> 시리즈로 유명한 변영주 감독님의 첫 상업영화 데뷔작인 <밀애>의 연출팀을 경험하기도 했다. 친한 선배가 감독 데뷔를 준비 중인 작품에 합류해서 영화사가 잡아준 호텔방에 틀어박혀 시나리오를 쓰는 일도 하면서 학교생활과 일을 병행했다.


좋아하는 거 배우는 것도 좋지만
편입 준비를 좀 해보면 어때?

학교 졸업을 앞둔 시점에 전화가 한통 걸려왔다. 어머니의 전화였다. 어머니는 나에게 이제 졸업 후 뭐를 할 거냐고 물었다. 당연히 영화판에 몸을 담고 조감독도 하고 시나리오도 쓰고 하면서 내가 고등학교 시절부터 꿈꿔왔던 영화감독이 될 거라 말했다. 직접 만든 단편영화로 독립영화계의 주목도 받았고 충무로 상업영화를 경험하기도 하는 등 감독으로 데뷔하기에도 꽤 괜찮은 이력을 차곡차곡 쌓아 가고 있었기 때문에 머지않아 장 뤽 고다르처럼 30대가 되기 전에 영화감독으로 데뷔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도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내 대답을 다 듣고 나서 하는 말은 이랬다.   


"네가 좋아하는 거 배운다고 학교도 알아서 정해서 다니고 했지만 전문대 졸업에서 그치지 말고 편입 준비를 해보면 어때?"      


그제야 나는 어릴 적 꿈을 키워오며 다녔던 이 학교가 전문대라는 것이 실감 났다. 4년제 대학을 못 가서 전문대를 간 것도 아니었고 지금까지 전문대생이라는 꼬리표에 큰 불편함은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부모님은 지금껏 내가 살아가는 삶에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진로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에게 꺼내셨다는 것은 한국사회가 규정해놓은 전문대 졸업생이라는 내 신분에 대해 여러 가지의 생각을 하셨을 거라고 짐작했다.     


별 고민하지 않고 어머니 말씀대로 편입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면 어떤 과를 가야 하나? 영화과를 다시 가는 것은 이미 배운 것을 2년 더 배우는 것뿐이라 나에게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대학교를 다니기 전 초중고 시절을 거슬러 올라가 그때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잘했는지를 생각해보았다.      


지금이야 1개월 뒤에는 파쇄기에 처박힐 사업계획서나 제안서 같은 시답잖은 글 나부랭이나 사무실에서 끼적대고 있지만 어릴 적엔 나름 문재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선생님들에게 글솜씨를 칭찬받았다. 여기저기 백일장이나 독후감 대회 같은 데 나가면 늘 상도 타 오곤 했다. 다른 이들에게 칭찬을 들었던 유일한 주특기가 글쓰기였던 것이다. 나는 생각을 거듭한 후 책도 좀 읽고 시나리오도 많이 쓸 수 있겠다는 막연한 생각에 국문과를 가기로 결정했다.   

  

그러면 편입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포털사이트에 편입이라고 검색해보니 누군가가 편입학원이란 걸 다녀야 한단다. 그래서 바로 학원을 방문했다. 상담자는 편입학을 하려면 학점과 영어라는 게 필요하단다. 그러면서 묻는다. 


"학점이 어떻게 되나요?"

"학점이요?" 


예술대학을 다니면서 학점 자체를 신경 쓴 적이 없었다. 나뿐만 아니고 다른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졸업하면서 겨우 3.0을 턱걸이했다고 대답하자 상담자가 어이없다는 표정이다.     


“여기서 공부하는 친구들은 대부분 3점대 후반이나 4점대가 평균이에요. 이미 대학 입학하면서부터 편입 계획을 세우고 학점관리를 하는 거죠. 근데 뭐 학점은 어쩔 수 없는 거니 학생은 대신 영어에서 압도적으로 점수 차이를 내야 할 거 같아요.”     


학점이라. 지금 생각해보면 서울예대 시절의 학점은 치열하게 스펙을 쌓아가는 요새 학생들과 비교하면 매우 부끄럽기 짝이 없는 숫자다, 그러나 이 점수는 어쩔 수 없는 고정불변의 것. 결국 내가 편입의 문턱을 넘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할 것은 영어밖에 없었다. 고등학교 때도 사교육을 받은 기억이 없는데, 대학 졸업 후 편입용 입시 학원을 다니게 되다니. 그래도 "고등학교 시절 즐겨 듣던 팝 음악 덕분에 영어를 좋아했고 성적도 좋은 편이었으니 이것도 잘될 거야"라고 자위하면서 곧바로 학원 등록증을 끊고 편입용 영어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국문학도와 공대생 모두를 경험하다니..
    

미국 대학원 유학용 시험이라는 GRE에 등장한다는 알파벳의 조합조차 괴상해 보이는 단어들을 대략 6개월 정도 꾸역꾸역 외웠다. 그랬더니 편입용 영어 모의고사 점수가 차츰 올라갔고 중앙대 국문과에 편입하게 되었다. 국문과 공부는 매우 즐거웠다. 얄리얄리 얄라셩~~ 흥얼거리는 고려가요를 암송하는 것도, 1930년대 근대문학들을 읽어보는 것도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학과 소모임에서 영화에 관심 있는 친구들과 함께 시나리오를 쓰고 토론하는 것도 소중한 추억이다. 국문과를 다닌 덕택에 난생처음 국어 과외도 해보고 보습학원에서 중학생을 가르치는 선생 노릇도 해보았다. 문화콘텐츠라는 새로운 분야도 접하게 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사실상 취업이 잘 안 되는 문송들을 위해 인문학을 실용과 연결시켜 그럴싸하게 포장한 위장 학문 이였지만 말이다. 졸업논문으로는 채만식의 소설을 문화콘텐츠화하는 방법에 관한 주제를 썼는데 우수졸업논문상을 받으면서 편입을 한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


대학을 입학하면 언젠가 졸업을 하게 되고 졸업을 앞두면 앞으로의 삶을 고민하게 마련이다. 예대를 졸업할 땐 사실 미래에 대한 생각이 별로 없었는데 이번엔 정말로 걱정이 되었다. 위대한 예술가가 될 거라는 몽상을 부여잡고 있는 예술대학의 학생들과 달리 취업을 걱정하는 보통 학생들의 현실을 지켜보았고, 그사이 나도 덜컥 물이 들어 그들과 똑같은 걱정을 하게 된 것이다. 한편으론 이제 다시 영화판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나 하는 고민도 했다. 하지만 덜컥 겁이 났다. 연봉 500만 원의 삶들이 비일비재한 생활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어느덧 20대 후반의 나이를 향해 나아가던 그 무렵의 나는 미래가 두려웠던 것이다. 졸업 무렵 나는 현실과의 비겁한 타협책으로 방송국 PD 시험이나 봐볼까 하며 언론 스터디 같은 것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KAIST 문화기술대학원이라는 걸을 알게 되었다. 신문에 우연히 난 대학원 소개 기사를 보고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말 그대로 문화콘텐츠에 들어가는 다양한 기술을 연구하는 대학원이다. 이순신을 다룬 TV 사극의 원작을 쓴 소설가와 영화 스태프로 참여한 컴퓨터 공학자가 교수로 재직 중이고 인문, 융합형 연구를 한다는 점이 맘에 들었다. 영화도 만들었고 문학도 공부했던 내가 여기에 들어가 공학을 접목하면 무언가 새로운 것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가 생겼다. 취업이 확정된 졸업예정자들과 그렇지 못한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갈라지며 스산한 분위기로 변한 2006년의 겨울, 가운데 서 있던 나는 대학원 원서를 인터넷으로 접수하고 다시 가방끈을 늘려보기로 결심했다.     


입학해보니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학제 간 융합을 목표로 선발된 인문, 예술, 공학 제각각 다른 분야의 학생들을 만났다. 나처럼 현업을 조금이나마 했던 또래들도 있었고 학부 졸업하고 바로 온 동생들도 있었다. 다들 각 분야에 재능 있는 학생들이었다. 밤새 게임만 하다가 졸린 눈을 비비며 온다거나 하루 종일 프로그래밍에 매달려있는 이른바 긱(Geek)들이 많은 학풍이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파는 힙스터의 천국인 서울예대 하고도 은근히 흡사해 보였다. 전혀 공통점이 없어 보이지만 상극은 본래 통한다고 실제로 서울예대의 학생들과 KAIST의 학생들은 창의성이나 관심분야를 대하는 태도의 측면에서 상당히 유사한 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역시 시간은 가고 어김없이 졸업은 다가온다. KAIST 자체의 정체성은 어쨌거나 공대이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공학적인 사고방식과 연구를 요구했다. 이 때문에 인문, 예술 베이스의 학생들이 학위논문이나 논문 자체를 쓰는 것에 무지 애를 먹는 것을 보아왔다. 나 역시 3학기가 되자 어떤 주제로 연구를 하면 졸업을 할 수 있을까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3D 입체영상이라는 것이 떠올랐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영상공학에 내 주특기인 영화라는 것이 혼합한 주제였다. 올커니하고 연구를 시작했다. 3D 입체영상을 한다고 하니 많은 응원을 해주신 소설가 출신의 지도교수님, 당시로써는 매우 비싼 3D 입체영상 전용 모니터를 학교 연구 비용으로 지원해주신 대학원 원장님 덕분에 주말에도 연구실에 나오며 신나게 공부를 했다. 당시 지방에 분산되어 있었던 3D 입체영상관들을 배낭여행하듯이 며칠간 돌면서 지금까지 제작된 국내의 콘텐츠들도 살펴보았다. 각 분야 여러 전문가들을 수소문해서 직접 만나고 미국의 학회 콘퍼런스에 직접 가서 3D 입체영상을 연구하는 해외의 연구 트렌드도 파악했다. 당시 KAIST가 수행했던 프로젝트 중에 베트남의 문화유산을 디지털 콘텐츠로 개발하는 내용이 있었는데 프로젝트에 참여해서 3D 입체영상 기술을 접목한 미니 다큐멘터리를 직접 만들어보기도 했다. 케이스 스터디, 기술 연구, 콘텐츠 개발 등을 대학원에서 동시에 경험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졸업할 때쯤 <아바타>라는 영화가 개봉했다.     


아바타 발 3D 광풍이 바꾼 나의 삶

2009년 할리우드 발 아바타 광풍은 한국에도 불어닥쳤지만 정작 우리나라에는 전문가가 거의 없었다. 물론 공학의 한 분야였기 때문에 관련 분야를 연구한 공학자들도 상당수 있었고 3D 입체영상기술을 도입한 콘텐츠들도 전시관 용으로 이미 만들어진 상황이기 때문에 콘텐츠 제작자도 있었다. 하지만 공학과 콘텐츠 양쪽 시각을 아우르며 통합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이는 드물었다.


3D 입체영상을 사업화하거나 연구개발을 하고자 하는 기관, 회사들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두 가지의 영역을 모두 경험한 나를 찾는 상황들이 차츰 발생했고 졸업 후 지금 하고 있는 일의 영역, 이른바 디지털 콘텐츠 산업에 자연스럽게 진입하게 되었다. 프로젝트 건으로 계약을 하는 위촉연구원 일종의 프리랜서로 활동하며 다양한 회사, 기관들과 일을 했다. 대학과 한국콘텐츠진흥원 같은 곳에서 강의도 하고 학생들이 3D 입체영상을 배울 수 있는 커리큘럼 같은 것도 만들고 교재 같은 것도 썼다. 직접 3D 입체영상을 촬영할 수 있는 장치인 리그(Rig)를 개발하는 대규모 연구개발 사업에 연구원 신분으로도 참여했다. 단편영화 형식을 갖추고 기술을 시범적으로 도입한 3D 입체영화도 만들고 영화인들에게 영화 제작기술을 가르치기도 했다. 당시 영화진흥위원회는 3D 입체영화를 보급 확산시키기 위해 대규모의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이 연구를 총괄하는 책임연구원으로서의 큰 기회도 얻게 되었다.   


콘텐츠도 만들고, 강의도 하고, 전문서적도 쓰고 종종 언론에 기고도 하면서 국내의 몇 안 되는 3D 전문가라는 타이틀로 약 2년을 살았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지금처럼 자유로운 신분으로 계속 살 수 있을 것인가" 의문이 들었다. 특히 일을 할 때면 항상 어떤 업체를 끼고 그 업체의 소속으로 계약을 해야 하는 운신 상의 제약이 점점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강의나 기고야 내가 직접 수당을 받는 것이 가능했지만 당시 나에게 직접 의뢰가 들어온 콘텐츠 제작이나 연구 관련 과제의 경우 반드시 법인 같은 회사를 중심으로 진행해야만 했다. 나에게 들어온 일들을 내가 아는 콘텐츠 관련 회사에 연결시키고 나에게 책정된 비용을 간접적으로 받는 식으로 일을 하곤 했는데 이런 상황들이 반복 지속되면서 갑갑함을 느꼈던 것이다. 회사라는 매개체를 거쳐야 했기에 예산의 수행이나 사업내용의 변경이 되면 어쩔 수 없이 해당 회사에 일일이 내용 통보를 하고 컨펌을 받아야 하는 수고도 발생했다. 회사의 독자적인 자금집행 방침이 있기 때문에 지정된 월급날에만 내 인건비를 받는 것도 번거로웠다.     


콘텐츠를 만들어도 결국 다른 회사의 명의가 되었고, 연구를 해도 관련 IP가 다른 기관의 소유가 되었기 때문에 내가 콘텐츠나 개발기술의 주인이 될 수 없는 구조도 불만이었다. 또 돈이 들어오기 전에 서로 으쌰으쌰하던 관계가 막상 제작비나 연구비가 회사의 통장에 꽂히면 변질되곤 했다. 서로 얼마나 기여를 했느니, 자체 부담금이 얼마니 하면서 회사와 내가 서로 동상이몽을 꾸고 감정이 상하는 상황들이 발생한 것이다.


결정적으로 갈등이나 분쟁이 발생하면 스타 배우나 작가 같은 극소수의 슈퍼을이 아닌 이상 개인은 기업에 절대적으로 불리하다는 진리를 뒤늦게나마 깨닫기 시작한 나는 2011년 초부터 슬슬 창업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따지고 보면 창업자는 영화감독이 하는 일과 매우 비슷하다. 스태프와 배우들을 통솔하기 위한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점이 그렇다. 또 하나의 이야기를 기획해서 투자를 받아 영화를 만들고 결과에 대한 무한책임을 지는 영화감독이라는 역할은 사업을 총괄하는 회사 대표의 상황과 매우 흡사하다. 영화를 연출하는 일 자체는 내게 너무나도 익숙했기 때문에 당시의 나는 별 어려움 없이 창업으로 바로 건너갈 수 있다고 믿었다. 나는 2개월 정도의 실무적인 준비를 거쳐 2011년 9월 파란오이필름(지금은 파란오이 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이라는 회사를 창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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