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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양현 Jan 04. 2018

익숙한 것과의 결별

달콤하기도 씁쓸하기도 했던 7년 동안의 소기업 창업일기

사무실로 계약한 오피스텔. 오늘이라도 취소가 가능할까?

익숙한 것과의 결별.

몇 년 전 작고한 자기계발 전문가 구본형 선생의 유명한 베스트셀러 제목이다. 그는 이 책에서 어제, 오늘, 내일이 다르지 않은 평범한 직장인도 삶을 바꿀 수 있다며 주도적인 자기 변화를 주문한다. 창업은 여기서 더 나아간다. 창업은 익숙한 것과 완전한 결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 달에 어김없이 아편처럼 통장으로 주입되는 월급, 테헤란로 한복판에 있는 널찍하고 멋진 사무실, 학력과 경력들이 쟁쟁하고 스마트한 동료들, 번듯한 직장 이름과 직급이 새겨진 명함을 건네는 순간 나를 바라보는 타인들의 경외심... 


나를 둘러싼 외피들과 완벽하게 결별하고 아무 일이나 좋으니 그냥 대충 밥이나 먹고살자는 먹고사니즘에 굿바이를 보내며 낯선 곳에서의 아침을 맞이하는 것이 바로 창업이다.     


직장을 그만두고 창업의 한 복판으로 뛰어든 순간, 직장을 다니는 동안 부여 쥐고 있던 심리적인 안전선은 완전히 무너진다. 주 5일 출퇴근이 일정한 직장을 다니지는 않았던 나는 직장인이 퇴직 후 창업하는 상황과는 다르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비교적 맷집이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였다. 창업을 준비하는 과정, 그리고 간판을 내걸고 창업자로 살아간 초기 3개월은 그동안 관성처럼 살아갔던 내 삶과 혹독하게 결별하는 과정이었고 그 과정 속에서 창업의 지속을 막는 수많은 번민들이 싹을 틔웠다.     


일주일 전에 사무실로 계약한 오피스텔. 오늘이라도 취소가 가능할까?

다시 박사과정에 들어가 공부나 계속할까?

그냥 이력서나 써서 취직자리를 알아볼까?

법인을 그냥 없애고 일단 안정적으로 개인사업자부터 시작해볼까?      


창업 준비 과정과 창업 초기, 창업의지를 꺾는 불순한 유혹들이 하루에도 부지기수로 반복되었다. 당시 나는 미혼이라 그나마 결혼한 이들보다는 창업에 대한 부담감이 덜했을 것이다. 지금이라면 어땠을까? 창업자금으로 준비한 약간의 퇴직금, 아파트를 담보 삼아 당겨버린 대출금의 숫자를 헤아리다가 밤을 홀딱 새우지 않았을까? 옆에 곤히 자고 있는 처자식을 생각하면 20년 전에 끊은 담배를 다시 피웠을지도 모르겠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 했다. 그렇다. 정말 개고생이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만한 직장에 다니던 내가 창업을 한답시고 사표를 낸 후 사무실을 박차고 나가는 순간, 개고생은 시작된다. 더 이상 삼성전자의 김대리, 현대자동차의 이과장이 아니다. 이제부터는 듣보잡 회사의 창업자이자 소상공인, 자영업자로 출발하는 것이다.     

 

직장을 다닐 때의 나를 그려본다. 9시에 출근하고 6시에 퇴근하는 삶, 뭐 이따금 야근도 하지만 그래도 매월 25일 월급이 통장으로 꽂히면 그날만은 즐거웠다. 여름이면 5일짜리 휴가를 내어 해외여행도 가고 추석이면 약간의 상여금으로 가족선물도 사곤 한다.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모자랄 것도 없는 중산층의 삶이었다. 늘 일정하고 주어진 궤도를 도는 행성과 다름없는 나는 1년 뒤, 5년 뒤 10년 뒤의 내 모습을 그릴 수 있었다.     


회사 통장의 잔고는 늘 말라있다.

이랬던 내 일상이 궤도를 완벽하게 일탈하면서 이번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길을 헤쳐나가야 하는 탐사선으로 바뀌어야만 한다. 창업을 준비하는 과정 속에서 창업을 되물리는 수많은 번민을 간신히 이기고 일단 간판을 올리고 좌판을 깔았건만 회사가 6개월을 망하지 않고 버틸 수 있을지 1년 뒤에도 회사가 존재할지는 아직 장담할 수 없다. 안정적인 캐시카우나 거래처를 확보하지 못했기에 입출금의 흐름을 파악하고 장기적인 회사 재무계획을 잡는 것도 무의미하다.      


회사 통장의 잔고는 늘 말라있다. 집에 있는 쌀독에 쌀이 없으면 가장은 식솔의 밥을 먹일 수가 없기에 조바심이 난다. 마찬가지로 회사의 대표는 법인계좌의 잔고가 바닥이면 직원들의 월급을 줄 수 없기에 속이 타들어간다. 회사를 다닐 다닐 무렵은 매월 25일이면 내 통장으로 월급이 주입되기에 잠시나마 행복했는데 이제 25일 급여이체일이면 얼굴에 근심이 가득 드리워지게 마련이다. 내 월급을 까는 데서 모자라 개인통장에 있던 몇 백만 원을 법인통장으로 쑤셔 넣어 가까스로 이번 달 급여이체를 하고 나면 며칠 되지 않아 이번엔 매월 1일로 설정해놓은 법인카드 결제일이 다가온다. 여기저기 융통해 법인카드 결제를 간신히 해결해놓으면 그다음엔 150만 원짜리 사무실 월세일이 기다리고 있다.      


이외에도 통장의 잔고가 사라지는 방법들은 무궁무진하다. 우선 직원들의 4대 보험료가 대표적이다. 4대 보험료 중 절반을 회사가 부담하기 때문에 10명 미만의 사업장의 경우 직원수와 월급여와 비례해 수백만 원의 비용이 매월 고정일에 빠져나간다. 4대 보험이 들어있으면 당연히 직원들의 퇴직금도 추가적으로 적립해놔야 한다. 창업자금 목적으로 대출을 받았으면 수십만 원대의 이자가 잊지 않고 통장을 만나러 올 것이다. 법인세, 지방세, 소득세, 등록 취득세 등 다양한 이유와 목적의 세금들이 수시로 잔고를 약탈하듯 빼낸다. 전화, 인터넷 같은 각종 통신료와 전기세 같은 관리비, 세무사에게 지출하는 기장료도 매월 지출해야 하는 고정비용이다.     


통장에 잔고가 가득하면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고 무엇을 해도 기운이 솟는다. 반대로 통장에 잔고가 시원찮으면 늘 허기지고 힘이 빠진다. 창업을 하면 인터넷뱅킹으로 통장의 잔고를 열어보는 일이 매우 두려운 일 중 하나가 된다. 창업자의 숙명은 통장의 잔고와 날마다 악전고투를 하는 일이며 창업자의 목표는 통장의 잔고와 진검승부를 벌여 최후에 웃는 자가 되는 것일 것이다.     


일주일 전에 비딩을 한 영상작업은 아쉽게도 다른 업체로 선정되었다는 문자가 냉정하게 날아온다. 엊그제 PT를 한 정부지원금 사업은 심사위원들이 너무 혹독하게 공격을 해서 결과가 불안하다. 모 업체와는 2주일 전에 영상 건으로 헐값계약을 했는데 그나마 그 건도 차일피일 업체가 선입금을 미룬다.     


회사 다닐 무렵 관계자들에게 명함을 건넬 때 느꼈던 경외심은 이번엔 여긴 무슨 회사지? 하는 반응으로 바뀌어있다. 예전엔 전화 한 통화하면 만사가 오케이였는데 이젠 전화를 수차례 걸어서 읍소 해야만 가까스로 수습되는 일들이 대부분이다. 갑에서 을로 포지션이 변경되었기 때문에 늘 누군가에게 자세히 설명하거나 벌어진 일을 구구절절 해명해야 일이 진행된다. 화려하고 빵빵한 경력을 가진 동료는 온데간데없고 구인사이트에 하루속히 공고를 올려 일주일 전 느닷없이 사표를 던진 직원의 대체자를 찾아야만 한다.


여명의 눈동자를 만나기 위해 오늘도 밤과의 사투를 계속 이어간다

무진기행을 읽는 것도 아닌데 정말로 안갯속처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낯선 길을 걷고 있다. 창업 초기 통장의 잔고가 순식간에 사라지거나 비딩을 붙었던 결과가 낙방으로 통보되었을 때,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월터 아이작슨이 쓴 900페이지짜리 스티브 잡스 전기나 픽사 스튜디오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다룬 픽사 이야기를 아무 쪽이나 펼쳐 읽곤 했다.     


잠시 시름을 잊기 위해 진행한 자투리 독서는 한 모금 커피에 담긴 카페인 같은 것. 다시 현실로 돌아오면 온갖 낯선 것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창업의 시간. 익숙한 것들과 결별하고 낯선 것들과 친해져야 하는 시간이다. 낯선 이 시간들을 본래 친한 친구였던 것처럼 익숙해져야만 창업의 일과를 버텨나갈 수 있다.       


지루하고 긴 밤이 끝나면 한줄기 빛이 창문에 새어 들어오면서 새벽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한줄기 빛, 그 희미한 빛을 한 번이라도 쬐기 위해 우리는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칠흑의 어둠을 기약 없이 기다리고 기다린다. 밤은 언젠가 끝난다. 그러나 여명의 눈동자를 아직 만나지 않았기에 우리는 오늘도 이 낯선 곳에서 밤과의 사투를 계속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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