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범이 된 조선인 포로감시원의 르포르타주
8월 15일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우리는 일단 무기를 반납하고 자유의 몸이 되었다. 주택가의 가옥 몇 채를 점거한 후 조선인이 집결되었다. 우리는 그 이름을 조선인민회라 명명했다. 조직 구성원 대부분은 포로감시원이었다. 현지에서 군대에 입영했던 자, 육군 형무소에서 복역한 자 들도 돌아왔다. 위안소에 있던 여성들은 보이지 않는다. 어디에나 사람이 모이면 조직이 생기고 운영주체가 생기는 법이다. 우리는 조선인으로 갑작스레 일본군에 끌려와서 곤욕을 치렀기 때문에 고국으로서의 송환을 서둘어야 한다며 연합군 측에 교섭을 벌려본다. 한편, 패잔군인 여기 일본군은 뉴기니의 미개척지로 투입되어 7년간의 노동 부가한다는 풍문이 떠돈다.
연합군의 지휘부가 이미 자카르타에 상륙을 했고, 일주일쯤 후에는 화란군과 영국군이 상륙하였다. 연합군이 상륙 후 임무를 수행함에 따라 바깥 정세는 날로 시끄러워진다. 그러나 우리는 무위도식하며 귀국하는 선편만 기다린다.
나는 의복을 원주민 식으로 입고 카푸카스 여인의 집을 자주 찾았다. 때로는 낮에 때로는 석양의 어둠이 깃든 때를 택한다. 낮에는 낮잠도 자고 목욕도 하곤 했다. 밤을 보낸 후 아침이면 급히 마차를 타고 돌아올 때도 있다. 그녀와의 사이는 깊어만 갔으며 이제 우리는 떼어 놓을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사랑은 익을 대로 익었다. 그러나 주변 정세는 예측하기 어렵다. 나는 금반지와 손목시계를 그녀의 집에 맡겼다.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궁리해본다. 촌락으로 들어가서 은신하면 어떨까? 내가 여기 새 나라의 국군으로 들어간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나 이곳에 정착해버리면 고국의 부모 형제와 재회할 것을 단념하는 것이 되며 불안을 자초하는 행동일 수 있다. 조선인민회에서 귀국을 서들고 있는 중이니 출항 날짜가 정해지면 그녀도 같이 갈 것을 상상해 본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최상의 방법이다.
그러나 그 방법이 진정 통할지는 의문이다. 일본 여인들은 군복을 입고 머리를 깎고 전투모를 쓴 채 위장을 해서 자칫 모를 연합군의 행패에 대비한다고 하니 그런 방법은 어떨까. 그러나 민회에는 여인이 없다. 위안부로 끌려온 조선의 여인들을 어디로 갔을까. 내가 먼저 귀국하고 좀 더 평화가 오면 그녀가 따라오는 것은 어떨까? 여러 안들을 놓고 우리는 숙의를 거듭했다. 그러나 어느 안이고 완전히 믿을 수 없고 안전한 것이 못되어 결정과 행동으로 옮길 수 없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그녀의 집에 가는 길에 대창을 든 부대원 몇 명으로부터 검문을 받았다. 그들은 자기들의 동정을 살피는 간첩이 아니냐며 대창을 들이대고 심문을 한다. 내가 그전의 근무지를 말하니 그들은 쉽게 소재를 파악했다. 나는 그들처럼 식민지였다가 해방된 조선인임을 인식시키고 실종된 동료를 찾으러 간다고 변명을 했다. 그러자 대창을 거워들이며 통과를 시킨다. 진땀을 빼며 상황을 겨우 모면하였다. 그 후 그녀는 자전거를 타고 와서 우리 숙소를 확인하고 갔다. 나는 봉변을 당할까 우려하여 이동을 자제하면서 그녀를 찾는 빈도가 드물어졌다.
나는 그녀가 일본 군복을 입고 우리와 같은 머리 길이로 머리의 아래쪽을 깎은 채 전투모를 써 신분을 위장하고, 명부에 이름을 올려놓고 우리와 같은 숙소에서 대기하면 운이 좋아 같이 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예상할 수 없는 곤욕의 길일 수 있으니 실행에 옮기는 못했다.
정세는 날로 험악해졌다. 더 이상 그녀의 집은 갈 수 없게 되었다. 연합군의 진주가 늘어남에 따라 현지 독립군의 경계태세도 삼엄해진다. 독립군은 점차 도시의 주변으로 확산된다. 독립군은 주로 소총부대와 대창부대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수에 있어서는 단연 연합군보다 우세하다. 그중에서도 공산당의 세력은 그 조직과 정보 면에서 뛰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