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범이 된 조선인 포로감시원의 르포르타주
드디어 인도네시아 독립군과 화란군과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제 일본어 신문은 없어졌다. 나는 화교들이 읽는 한자 신문에 의지해 대략의 정세를 판단한다. 승전국이 된 화란은 그전의 권리를 회복하려 했다. 인도네시아의 독립적인 권한은 일부 인정하나 승전국의 입장에서 식민지를 잃기는 싫다는 것이다. 독립정부로서는 외세의 압박을 전적으로 배제하는 게 목표니 양측 간에 충돌이 없을 수 없다. 도시를 둘러싼 외각의 지대에서 매일 총격이 산발적으로 계속된다. 반둥(Bandung)에서는 독립군 저항이 너무 격렬해서, 화란군 측은 결국 일본군의 기갑부대까지 동원시켜 독립군의 토벌 작전을 했다. 임무를 마친 부대는 그 공로로 제일 먼저 고국에 귀환시켰다 한다.
연합군은 도시를 점령하고 일본군을 무장해제시켰으나 통치권은 좀처럼 수중에 넣지 못했다. 협상은 난항이다. 주민의 자치권을 인정하고 사법권과 경찰권을 세우려 하나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한편 세계의 여론은 약소국가의 자주권을 옹호했다. 소련은 영국군의 즉각 철수를 요구해 독립군의 사기를 고무시켰다. 이에 영국군은 일본군의 무장해제만 완료하면 바로 철수할 것이라 답변한다. 이러한 와중에 우리 조선인민회는 고국으로 귀향할 꿈만 되새기고 있다.
하지만 포츠담 선언의 10번 조항, 전범을 엄격하게 재판을 할 것이라는 내용이 우리의 심기를 자꾸 거슬리게 한다. 사람은 누구나 난처해질 때 자기의 입장을 유리하게 해석하려 하는 법이다. 지난 3년 동안 포로수용소나 억류소에서 여러 가지의 크고 작은 사건들이 발생했다. 감시를 하고 감시를 받는 나날인데 접촉이 없을 수 없다. 급양의 문제라든가 근본적 처우 문제는 우리들의 책임은 아니겠지만 우발적 사고들이 몇 번 발생했다. 언젠가 점호를 했을 때다. 어느 늙고 쇠약한 포로 한 명이 말을 잘 듣지 않아 동료가 뺨을 때렸다. 그자는 뒷걸음으로 물러나면서 손을 피하려다 발이 미끄러져 하수구에 넘어졌다. 그날의 그는 공교롭게도 나막신을 신었었다. 그는 뇌진탕이 오면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불의의 사고였지만 사람이 죽어버린 것이다.
모든 것에 일본군의 군기를 적용해야 하니 경례 같은 것도 규칙이 된다. 갓 들어온 젊은 훈련병의 미숙함에 상관은 따귀를 갈기고 기합을 줘 육체적 고통을 안긴다. 그러나 그 안에는 보이지 않은 애정이 작용한다. 상하 관계는 엄격하나 우리 중대, 우리 분대 등 우리라는 의식이 작용한다. 그러나 포로의 경우, 그 정도로 엄한 군기가 있거나 무리한 노역을 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와 포로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적대 관계라는 의식이 작용한다. 언제 무슨 사태가 발생할지 늘 염려해야 한다.
당연히 우리와 포로의 관계에서 애정이란 있을 수 없다. 우리와 포로의 관계는 생과 사를 오고 가는 극단적 상황도 염두에 두어야 하기 때문에 명령은 준엄하다. 게다가 피부색의 차이나 언어의 불통, 종교의 몰이해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전쟁의 진행과정도 암암리에 작용한다. 일본군이 승리를 거듭하면 고위 장교들의 낯꽃도 펴진다. 반면에 패전의 연속, 옥쇄 등의 정보가 입수되면 그들의 얼굴에 어둠이 깔린다. 그것들이 암암리에 포로의 처우에 작용한다. 상관의 일언일구는 부하들에게 민감하게 작용한다. 상관이 한 명을 골라내라 하면 부하는 둘을 골라낸다. 상관이 두 사람에게 체벌을 주어라 하면 그들은 세 명에게 벌을 준다. 본래 사병이란 이성이 없어야 한다. 그것이 군대의 기능인가 보다.
우리는 우리가 그동안 수용소에 벌인 하나하나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상부에 돌렸지만 속으로는 기우에 찬 나날이 이어졌다. 갑자기 조선인민회에도 출역을 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비행장으로 가서 활주로의 물을 쓸어내라는 것이다. 직접 가서 보니 넓디넓은 아스팔트에 물이 괴였는데 물을 퍼 나를 도구가 없다. 손으로 혹은 모자를 벗어 쓸어내야 한다. 매일 비가 내렸는데 비를 맞고서라도 그 작업을 해야만 했다. 변명이나 의견 따위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며칠이나 계속했을까. 비행장에는 성능이 좋아 보이는 비행기들이 많이 이착륙했다. 한쪽 구석에 있는 일본 비행기는 밑에서 핸들을 손으로 돌려 시동을 하는 것이 특이했다. 고작 저따위의 비행기를 가지고 전투를 했단 말인가?
그 후 우리는 영국군 부대의 잡역을 돕게 되었다. 청소에서부터 취사 보조 등 여러 가지를 망라했다. 그들은 우리를 조니(Jony)라고 불렀다. 그들의 입에서는 항시 노래가 흘러나왔다. 전쟁에 이겼고 귀국의 날이 가까워진 탓도 있겠지만 그 부대의 특성인 것도 같다. 어떤 병사 하나는 페인트칠하는 것이 그의 직업이었다고 한다. 빨간 얼굴색에 폭소를 자주 터뜨린다. 그는 손가락으로 시늉을 내며 계집애 하나를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도 한다. 우리는 그를 원숭이라고 별명을 지었다.
영국군의 입장에서는 이제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하였으니 할 일이 없다. 독립군과의 싸움에 가담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구판장이나 홀 같은 오락시설을 만드는 일 막사 주변에 기름을 뿌려 벌레를 없애는 일이 그들의 주요 업무다. 화란군을 일컬어 더취 더취(Dutch Dutch)하면서 그들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음을 우리에게 노골적으로 표시한다. 예전부터 양국은 식민지 쟁탈전의 역사가 있었다. 그의 화란인 비하는 아직도 그 역사가 진행되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연합군의 군량은 대부분 미군의 원조에 의지했는데, 시중에 미군이 뿌린 레이션이 범람했다. 고기 깡통 한 개와 원주민 아이들이 내민 감자 두세 개가 서로 교환한다. 육류는 지천으로 넘치는 듯 연합군은 소고기는 대강 살만 도려내어 먹고, 갈비나 머리뼈는 모조리 묻어 버렸다. 우리는 그것을 다시 파내서 뜯어먹기도 했다. 두 명의 보초병 중 한 명이 취사장에 소리를 치니 두 점의 카스텔라 빵이 나왔다. 한 명이 빵을 다 먹고 있는데, 다른 한 명은 아무런 표정도 없다. 우리 같으면 한 점이라도 같이 나눠 먹을 텐데 그들의 개인주의가 철저함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