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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양현 Jan 13. 2019

천황폐하의 축어를 읽다

전범이 된 조선인 포로감시원의 르포르타주

항복선언문 발표

우리는 날마다 본국에서 중계되는 라디오를 들었다. 신문은 일본어 신문인 ‘자바 신문’이 유일한 보도기관이다. 1945년 8월 14일 라디오에서 내일 정오에 천황폐하의 축어가 있을 것이라고 예고했다. 천황폐하가 직접 방송을 한다는 뜻인데 지금까지 그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우리 모두는 15일 정오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그 시간에 아무 말이 없다. 저녁이 되니 장교 회의가 소집되었다. 다음날 16일 사병들에게도 항복의 발표문이 공시되었다. 

일본 천황이 발표한 항복선언문 일부


나는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통증을 느꼈다. 곪고 곯은 속을 피부로 잠시 가린 이 땅에도 드디어 맨살이 터지고야 말았다. 경천동지 할 세상이 왔고 인간 하나하나의 운명은 알 수 없게 되었다. 동료 이외에는 아무에게나 말을 주고받을 수가 없어졌다. 정보를 듣는 것도 쉽지 않았다. 반쪽의 신문 만이 유일한 정보 입수 경로였다. 


전화 인사말 메르데카

8월 18일 자 신문에는 천황의 포츠담 선언 수락 기사와 함께 인도네시아의 독립선언이 대문짝만 하게 실려 나왔다. 대통령에 수카르노, 부통령에 한다 박사가 임명되었다. 이제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난감했지만, 옛 말에 불이 났으면 도구통을 세 번 흔들고 가라고 했다. 차분히 이 상황을 생각해보자.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적용되는 말은 “겉으로 울지 말고 속으로 울어라. 웃지도 말고 속으로 웃어라”가 아닐까. 필리핀과 달리 전후에도 독립을 약속받지 않은 인도네시아에 일본군이 갑작스레 독립을 주었으니 오죽이나 기쁘랴. 원주민들은 제2의 해방을 말한다. 일본군이 양성해놓은 몇 천 명의 원주민 방위군이 역설적으로 인도네시아의 독립군이 되었고 일본군에게 총 한 자루라도 더 많이 얻어내거나 뺏는 것이 중요한 일이 되어버렸다. 이들은 동네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선동했다.

“개미떼같이 많은 장정들이 있으니 총이 없는 자는 대창을 들어라. 전화는 없으니 쇠로 된 전주를 두드려서 그 소리로 뜻을 전달하라!” 


일본은 3년 전에 서양인을 몰아내 이곳을 해방시켰다. 원주민들은 동양인이 서양인도 몰아낼 수 있다는 기적을 보았고 3~4년의 경험으로 일본인이 제2의 서양인이 될 것이라는 예측도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그들의 코앞에 펼쳐진 운명은 승자와 제2의 전쟁이 시작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인도네시아기를 흔들며 독립운동을 벌이는 수카르노 지지자들(https://www.niod.nl에서 인용)

일본군의 입장에서 보면 연합군에 항복을 한 것이니 연합군이 상륙할 때까지 치안 유지를 해야 하고 그들에게 무기를 반납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안전한 귀국을 약속받을 수 있다. 새로 수립된 정부에 동정은 가지만 무기를 넘겨줄 순 없다. 설사 넘겨준다 하더라도 탱크나 비행기를 조종할 이가 만무하다. 그러나 방위군이 며칠 사이에 독립군으로 변신하면서 알게 모르게 무기와 탄약은 그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들의 인사말 “여보시오.”는 독립을 의미하는 “메르데카(Merdeka)”라는 단어로 쉽게 변경되었다. 도시, 시골, 산골짜기까지 “메르데카”가 가득 차 버렸다. 


낙하산으로 찾아온 연합국 사절

19일에 연합국 측 사절이 왔다. 비행기가 공중 상공을 한 바퀴 돌고 난 후 낙하산으로 사절이 내렸다. 일본군 사령부를 찾아가서 전달한 내용은 연합군이 상륙할 때까지 치안 유지를 잘하고 포로를 잘 보호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급양 지시도 떨어졌다. 포로들에게 육류, 계란, 우유 등으로 충분한 급식을 하라는 것이다. 매일 미군 수송기가 날아와 수용소나 억류소 상공을 돌면서 지붕에 그려진 적십자 표시를 보면 큰 짐 꾸러미를 낙하산에 매달아 내려 보냈다. 그 안에는 미군이 쓴 레이션 즉 식품이 다양하게 들어있었다. 기쁨을 감추지 못한 아녀자들이 손을 쳐들고 소리를 지른다. 어린아이가 짐꾸러미에 치어 죽었다는 웃지 못할 소리도 들린다. 어른만 있는 포로수용소는 그전보다도 더한 정적이 감돌뿐이다. 그들은 일본군의 지시대로만 행동한다. 한 치의 경거망동도 볼 수가 없다. 3년 반이라는 세월을 참고 견디어 왔는데 고작 며칠을 못 견딘다고 해서야 될 말인가. 현재의 포로는 감시를 당하는 것이 아니고 외부의 침입자로부터 보호를 받는 것이다. 


포츠담 선언문의 두 가지 조항

발표된 일본의 항복문서인 포츠담 수락 선언에서 선언의 내용이란 몇 가지로 요약된다. ‘일본은 연합국에 대하여 무조건 항복을 수락한다. 일본의 국토는 일본 열도 몇 개의 섬으로 한정된다. 일본은 민주국가가 되어야 한다. 일본의 영토는 본토와 부속도서로 한정한다. 항복한 일본군은 자기 가정으로 돌아가되 우리들의 포로를 학대한 자를 포함한 일체의 전쟁 범죄자에 대해서는 엄중한 처벌이 가해질 것이다’라는 것이다. 


우리의 관심은 이 마지막 두 조항에 쏠린다. 일본의 영토가 본토로 한정되니 그것은 조국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일 게다.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동안 일본인에 의해 얼마나 많은 압박과 강요를 당했던가. 어서 빨리 조국에 가보고 싶다. 부모와 처자들은 우리를 얼마나 기다리고 있을까? 


그러나 그다음의 조항이 꺼림칙하다. 우리가 관리한 포로들은 오랫동안 고생을 했다. 억류자 수용소에는 영양실조로 인해 노인, 아이들이 매일같이 죽어나갔다. 이제 입장이 바뀌었으니 그들이 우리를 어떻게 취급할까? 이제 와서 변명도 필요 없고 오직 관대한 처분을 바랄 뿐이다. 곧 연합군이 상륙할 것이라는 말과는 달리 아무런 정보도 없고 수용소는 평온이 유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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