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범이 된 조선인 포로감시원의 르포르타주
상관에게 폭행을 했다는 친구도 몇 달 형기를 마치고 돌아왔다. 성병으로 고생한 친구도 돌아왔지만 반대로 입원한 친구도 있다. 내가 다시 돌아온 제1분견소에는 여전히 친구나 포로의 드나듦이 심하다. 하루는 독일인 포로들이 들어와서 따로 수용되었다. 그들은 잠수함 탑승원인데 한 달 전까지는 일본과 동맹국으로 같이 협력하여 작전을 한 아군이었다. 1945년 5월에 독일이 항복을 했니 포로가 되어 6월에는 수용소 신세가 되었다. 한때 동맹이었던 국가 간의 매정함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동료에 이렇게 물었다.
“저 독일인들을 여기에 수용해야 하나?”
“글쎄. 같이 싸우자고 해도 믿을 수가 없겠지.”
“저들은 싱가포르를 기점 삼아 영미군의 배를 공격했다고 하는데.”
“일본군 측에서는 믿을 수가 없겠지. 전쟁에 보내서 영미군에 투항하면 역이용할지 모르니까.”
“우스운 운명이구먼.”
“저들도 태평양 바닷속에서 많이 생각해 봤을 거야. 투항 후의 처우나 운명에 대해서 말이야.”
“최선의 길을 택해서 여기 온 것이지. 그런데 내 생각난 게 있어.”
“뭔데?”
“내 양봉을 해봐서 아는데 벌도 갑자기 왕을 잃어버리면 일벌들이 갈 곳을 모르고 그 벌통이 망하거든.”
“그러니까 저 독일인 포로들은 왕을 잃어버린 곤충과 같단 말이지?”
“그렇지. 나라가 무너졌으니 공격용 잠수함도 필요가 없게 된 거지.”
“왕벌이 없어지면 벌의 독침도 필요 없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
“그러니까 나라가 있는 곳에 군대가 있고 군대가 있는 곳에 나라가 있구먼.”
이야기는 결혼으로 화제가 바뀌었다. 저번에 만난 카푸카스 여인 때문이었을까? 나는 속으로 국제결혼이 인류평화에 필수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계 국가가 되려면 국제결혼이 꼭 있어야 해. 오랜 세대 뒤에는 한 종족이 돼야 하니까.”
그러나 나는 동료의 핀잔만 들었다.
“너 또 이상한 소리 좀 하지 마. 뚱딴지같이.”
위병소에는 매일 같이 인도인이 한 명 드나든다. 그는 뚱뚱한 풍채에 흰 양복을 입고 왼쪽 손에 가방을 하나 들고 경례를 한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노상 보고 배운 군대식 경례로 허리를 절도 있게 구부리며 미소를 띤다. 그는 사무실에 들어와서 비로소 가방을 꺼내 자기가 내일 조달해줄 물건에 대한 메모를 받는다. 경례야말로 그가 가진 상술 중 핵심일 것이다. 일본군은 그들을 어용상인이라고 부른다. 어용상인의 대부분은 인도인이 차지한다. 원주민은 대부분 상술에 능하지 못하다. 이 나라의 상권을 쥐고 있는 이들은 화교지만 일본은 그들을 애용하지 않는다. 전쟁 전 화교들은 점포에 장개석의 사진을 걸어놓고 항일 선전과 원조금 모금 운동을 했다. 국민당 정권이 일본군에 의해 중경(충칭, 국민당 정부의 임시수도)으로 쫓겨난 후 싱가포르의 화교들은 막대한 금액을 모집해 전비를 충당케 했다.
일본군이 이곳에 들어온 후에는 장개석 사진이 걸렸던 자리에 왕정위(汪精衛, 왕징웨이. 쑨원과 친밀한 관계였고 국민당 정부의 관료였으나 중일전쟁 발발 후 친일파로 변절하여 일본의 괴뢰정권을 난징에 세웠다)사진이 걸렸다. 그는 현재 남경에 허수아비 정권을 수립하고 일본에 협조하고 있다. 일본군은 그전에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에 협조한 자와 내통한 자를 색출하여 무자비한 곤욕을 가했다. 싱가포르 해변에서 대량학살을 했다는 풍문은 동남아 화교에게 지금도 큰 공포로 남아있다. 따라서 이 지방에선 인도 상인이 당연히 믿음직스러울 것이다.
일상생활이 큰 변화 없이 계속된다. 물론 이 일상은 시한부 일상이다. 일본에서 연예인들이 찾아오고 여러 부대가 공연을 보기 위해 광장으로 모인다. 명창으로 칭송받는 가수가 나니와부시(일본 전통의 창곡) 한곡을 한 시간 이상을 읊는다. 용사들은 잠시 잊고 있었던 고국과 나 사이에 무슨 혈맥이 되살아난 듯 연민과 충성심이 뒤범벅이 된다. 가끔 틀어주는 영화상영도 심심치 않은 위로물이다. 낮이면 우리에 가둔 원숭이가 심심함을 면해주고 석양이 지면 유일한 운동인 배드민턴이 몸을 조금씩 풀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