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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randol Nov 26. 2016

오늘을 사는 하얀 자작나무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도 자작나무다"

겨울 숲은 별 볼 것 없다. 하지만 속을 다 드러낸 숲에서는 나무들의 솔직한 골격을 볼 수 있다는 것은 특별한 일이다. 앙상한 나뭇가지와 빳빳한 줄기에서 산 생물 같지 않은 나무. 그것을 들여다보면 푸른 잎에 가려 보지 못했던 옹이도 보이고, 날카로운 가시를 품고 살았다는 것도 알게 된다. 생각보다 가는 줄기에 놀라기도 하고, 수피의 다양한 무늬와 색도 유심히 보게 된다.

이 자작나무의 겨울 숲에서는 뭘 보게 될까. 잎을 다 떨어뜨리고 꼳꼳하게 선 수많은 자작나무에서, 물어볼 것도 없이 하얀색의 줄기다. 흰색 페인트를 칠한 듯한 모습에서 이국적인 풍경을 본다. 동네 공원에서조차 보았던 나무이지만, 이렇게 떼로 하얗게 존재하는 숲을 보게 되다니. 사방 백색으로 압도하는 이곳에서는 어떤 독백을 하더라도 백색 메아리로 돌려준다.

나무들의 이름이 대부분 그렇듯 자작나무란 이름 역시 자작나무스럽다. 희고 곧게 푸른 하늘로 자라나는 나무. 그래서 스스로 자라는 나무. 이건 그냥 혼자 생각이고, 자작나무의 이름은 흔히 자작자작하는 의성어에서 비롯했다고들 한다. 나무 같은 것이 활활 까지는 아니고, 조금씩 기분 좋게 잘 타고 있을 때 나는 소리. 하지만 사실 사전에는 그런 의성어는 없었다. '발을 조금씩 내딛으면서 위태롭게 걷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  '힘없이 천천히 걷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 '물이 점점 줄어들어서 바닥으로 잦아드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 "술을 직접 자기 손으로 따라 마심" 앞의 두 개는 몰랐던 뜻이다.  

자작자작한데서 자작나무라는데, 그렇게 자작자작 타는 건 자작나무의 특유의 하얀색 껍질이다. 글씨를 쓰는 종이 용도로도 쓰였다는데, 이게 기름을 많이 품고 있다. 불을 붙이면 당연히 자작자작 그렇게 탄다. 이 기름 냄새가 다름 아닌 피톤치트가 될 것이다. 그 유명한 자일리톨 껌의 독특한 원료도 이 껍질이다. 결혼식을 일러 화(華) 촉을 밝힌다고 하는데, 이때 화가 자작나무의 화(樺)란다. 촛불을 밝히는 게 화촉이란 건 알았지만, 이런 유래는 몰랐다. 그럼 광화문에 밝히는 촛불에도 특별한 '화'를 만들까.

다시 강원도 인제 원대리의 자작나무로 숲으로 돌아가서, 백색 숲 속에 앉는다. 0도를 맴도는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며 하얀 생각을 한다. 백지를 앞에 둔 하얀 마음이 되어 살아온 날과 살아갈 날을 적어본다. 무엇보다 오늘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다시 한다. 이 자작나무들도 아마 그럴 거라고 믿으면서. 지금의 이 삶을 하얀 축복이라 생각하고 육신을 드러내고 있지 않나. 봄과 여름, 가을을 다 보내고 지금을 오늘을 살지. 오늘이 모여 겨울이 될 테고. 폭설에 하나둘 가지가 뚝뚝 떨어져 나가더라도 그저 오늘을 살겠지. 잎이 다 떨어져도, 가지가 부러져도 아무것도 잃은 것 없다는 듯 태연하게.

땅바닥에 떨어진 삼각형의 나뭇잎들은 밟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도심에서 보기 어려운 새파란 하늘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유럽 어느 산림지대의 하늘 같다.  눈이 내려야 제격이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온통 백색의 풍경에 가느다란 선으로 그림을, 동양화가 될 터인데. 그러면서도 왜 춥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 것일까? 그건 아마 영하의 날씨에 더 잘 어울리는 자작나무 숲의 풍경 때문이 아닐까. 그도 그렇지만 더운 것 싫어하고 추운 데서 잘 자라는 그의  성격 때문이기도 하다. 엄동설한 한가운데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꽁꽁 싸매고 와서 다시 보고 싶은 풍경일세.

'러브 오브 시베리아',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대륙을 가로지르는 열차의 차장에서 바라보는 눈 덮인 자작나무 숲. 그 풍경을 배경으로 한 영화다.  영하 삼사십 도를 예사로 드나드는 동토 타이거 지방을 밝히는 하얀 자작나무.  우리나라는 주로 함경도 지방이 자작나무의 고향이다. 한반도에서 추위로 좀 알아준다 하는 함경도 땅에 자리 잡은 것은 당연하다. 자작나무 숲을 뒤로하고 자리 잡은 내 먼 고향집 풍경이 궁금하다. 아래는 고향 동네 시인 백석의 시 <백화(白樺)>다.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메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그리고 감로같이 단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산너머는 평안도 땅이 뵈인다는 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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