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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randol Jan 09. 2018

'겨우살이'는 열심히 겨울을 산다.

기생과 공생 사이, 생각보다 좁아요, 생각에 따라 달리 볼 수 있지요.

잎은 지고 가지만 남은 마가목 위에 초록색으로 핀 겨우살이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겨울에 쉽게 보이고, 채취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무 높은 곳까지 올라가 겨우살이를 채취하는 모습을 텔레비전에서도 본 적이 있다. 사람들이 어렵사리 겨우살이를 채취하는 것은 팔리는 약초이기 때문이다. 끓여서 물을 먹는데 여러 가지 약효, 그중에서도 항암효과가 있다고 한다. '주목'에서 '탁신'을 추출해 항암제로 쓰듯이 겨우살이에서도 항암 성분을 추출해 약을 만든다고도 하니, 과학적으로 근거 있단 소리다.  

필레약수. 들여다 보니 작은 샘에 물은 바닥일세.

겨우살이, 남다른 태생


1월 한겨울의 맑고 차가운 공기가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강원도 인제. 한계령이 지척인 이곳은 '필레약수'로 유명하다. 유명세에 비해 작은 약수터와 바닥을 드러낸 약수에는 좀 실망이다. 겨울이라 그런지 찾는 이도 잘 없다. 먹어보니 물에서는 특유의 '쇠' 맛과 약간의 탄산 맛이 난다. 수량(水量)은 허약하지만 보기와 달리 겨우살이처럼 약효도 좋단다. 하지만 약수 맛보기가 아니라 겨울나무 위에 걸친 겨우살이를 보러 왔다. 이 사실을 말하면,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있는 사람들은 아마 갸우뚱할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식당에서도 양파망 같은 데 겨우살이를 담아 팔고 있었다. 나무 위에 있는 것보다 먼저 잘라놓은 그것을 보았다. 이때 그 열매를 하나 맛보았어야 하는 건데 아, 깜빡.  

길 따라 산을 조금 올라보니 나무 위에 군데군데 겨우살이가 자라고 있다. 잘 모르고 보면 새집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겠다. 자세히 보면 특유의 겨우살이 모양과 함께 노란 열매가 달린 모습도 관찰할 수 있다. 맛이 좋아 새들이 그렇게 찾는 열매라는데, 새를 보지는 못했다. 사람 때문이겠지. 다른 많은 열매처럼 겨우살이 열매도 새를 기다린다. 새는 식물의 발이다. 새들이 열매를 먹고 씨앗을 멀리까지 보내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겨우살이가 다른 점이 있다면 땅이 아니라 나뭇가지 위에 갖다 놓기(싸놓기)를 원한다는 것. 열매 속에는 씨앗 하나가 들어있는데, 열매 육질이 무지 끈끈하다. 새는 부리에 잘 못 붙어버린 씨앗을 나뭇가지에 문질러 떼낸다. 먹고 나서는 나뭇가지 위에 똥으로 내보낸다. 그러면 씨앗은 특유의 끈끈한 접착력으로 가지 표면에 딱 달라붙어 뿌리를 내린다. 겨우살이의 남다른 태생이다.

강원도 인제 산기슭, 숲 속에서 겨울을 살고 있는 겨우살이

'기생'이란 굴레에서


사람들은 그것을 '기생'이라고 한다. 겨우살이 하면 '기생식물'이란 정의가 공식처럼 따라붙는 이유다. 기생이란 단어는 다른 종에 빌붙어 산다는 나쁜 의미를 품고 있다. 그러니까 '기생충 같은 놈'이란 욕도 있겠지. 기생하는 식물이라면 새삼이나 겨우살이, 더부살이 등이 단연 대표선수다. 잎도 뿌리도 없이 덩굴로 된 새삼이 완전 기생이라면 겨우살이는 반기생이다. 잎이 있고 엽록소가 있어 반쯤은 광합성을 해 스스로 생활한다는 뜻이다. 나름 길쭉한 녹색 잎을 반짝이며 햇빛을 갈구하는 이유다. 하지만 다른 나무의 몸에 뿌리를 내리고 그 나무의 물과 양분을 이용하는 본능 때문에 '기생'이란 타이틀의 굴레를 벗기는 어려웠다.

덩굴로 휘감고 기생하며, 숙주를 고사시키는 미국새삼


기생도 가지가지


기생도 여러 종류다. 숙주의 몸속을 처절하게 발라먹고 새 세상에서 다시 태어나는 살벌한 기생도 있다. 섬찟한 기생생물, 영화로 더 유명해진 연가시가 그렇다. 이 경우와 비교하면 겨우살이는 애교다. 기껏해야 나무의 몸이 울퉁불퉁해지는 병을 앓게 되는 정도다. 나무를 고사시키거나 하는 일은 거의 없다. 좀 색다른 기생도 있다. 탁란이다. 뻐꾸기가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놓는 일을 말한다. 뻐꾸기 알이 먼저 알을 깨고 나와 원래 주인의 알을 밖으로 밀어내는 모습. 그 생생한 생태가 얼마 전에 텔레비전에 방송되면서 널리 알려졌다. 이 경우도 결국 기생이다. 그러면, 개미가 진딧물 꽁무니에서 나오는 단물을 구하려고, 진딧물을 무당벌레로부터 보호해 지켜주는 일은 공생일까 기생일까 아니면 사육일까. 기생을 하기도 하고 공생을 하기도 하는 '버섯'이란 특별한 생물도 있다.


기생과 공생 사이


다시 겨우살이의 삶을 보면, 겨우살이라고 왜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태생이 그런 걸 어떡하나. 나도 흙에 뿌리를 내리고 살고 싶다고 말할 것만 같다. 겨울 시린 바람에 간신히 햇빛을 구하기보다는 겨울 눈을 만들어 봄이면 대지에 발을 활짝 피고 싶었다고. 열매는 새들의 귀한 겨울철 식사가 되고, 무채색 겨울산에 푸른빛으로 볼거리를 만드는 것도 내 일 아니냐고. 게다가 항암제라며 사람들이 체취해 가는 건 또 뭐냐고. 그러니 나는 기생이라기보다 그 반대편의 공생일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그렇게 항변하지 않을까. 나무 입장에서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다. 어차피 물관, 체관에 뿌리를 박고 한 몸이 되었으니, 입양했다 치고 젖 좀 나눠 줄 수 있을 테다. 동물과 다른 식물의 생리라는 면에서 본다면 크게 거부감을 가질 일도 아닐 듯하다. 한 곳에서 오래 살다 보면 옆의 나무와 가지나 줄기, 뿌리가 서로 붙는 경우도 종종 있으니까. '연리지', '연리목'이라고 있잖아. 그러고 보니 기생과 공생 사이의 간격은 생각보다 좁을 수 있고, 생각하기에 따라서 달라진다. 겨우살이도 공생을 위해 노력한다. 겨우 사는 것 같지만, 열심히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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