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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randol Jul 23. 2016

배롱나무 붉은 꽃 아래  여름의 전설이 자란다.

배롱나무 꽃이 피었다. '이렇게 무더운데, 왜 꽃이 안 피는 걸까?'하고 생각한 지가 얼마 전인 듯한데 진작에 활짝 피기 시작했네! 마젠타 색 주름진 꽃잎 속에 노란 수술도 여전히 독특하고. 여름 한철 붉은 꽃을 보여준다. 기다렸는데, 많은 꽃이 그렇듯 소리 없이 피고 있었다. 봄에도 그랬다. 다른 나무보다 유난히 늦게 잎을 피우는 종류여서 늦겠거니 했다. 근데 어느새 피어 있었다. 그래도 한참 늦은 때다. 회화나무와 함께 잎이 늦게 나는 걸로 유명하다. 다른 나무들이 연둣빛 새싹의 크기를 키우고, 색도 짙푸르게 바꿀 때. 배롱나무는 그때서야 특유의 작고 빳빳한 잎의 모양을 내기 시작했다.    

원숭이는 미끄러지고, 아녀자는 눈둘 곳 모르겠다는.

잎이 늦게 피는 만큼 배롱나무 수피는 눈길을 끌었다. 5월의 신록 사이에서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혼자 몸을 다 드러내고 있었으니까. 어쩌면 그걸 오랫동안 보여주느라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양반집 안채에는 배롱나무를 심지 않았다고도 한다. 잘 가꾼 나체처럼 윤이 나는 배롱나무의 몸을 보고 부끄러워한 옛사람들의 상상력이란. 일본에서는 원숭이도 미끄러질 나무라고 한다는데, 원숭이가 많은 나라다운 비유다. 정말 원숭이라도 맥을 못 추고 미끄러질 것 같다. 매끈한 수피 일부만을 보고 만진 다음 '이게 무슨 나물까?' 하고 물으면, 아마 당신은 니스칠로 마지막 가공을 거친 '원목'이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던 배롱나무에 꽃이 핀다. 학교 운동장 앞에 핀 나무모양을 보니, 피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하다. 장맛비가 그치고, 이제부터 이제 무더운 올여름 내내 눈 맞추고 말을 걸어 올 텐데... 동네 입구를 지키는  조그마한 세 그루, 도서관 뒤쪽 산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 크고 오래된 한 그루. 부산 태종대 태종사 앞의 배롱나무도 지금쯤 활짝 피었겠지.   

부산 태종대 대종사 입구의 배롱나무 관광열차가 달린다.

배롱나무 꽃은 우아하고 뚜렷하게 한 송이씩 피어나는 종류는 아니다. 하지만 주위를 압도하는 붉은 '단심'으로 여름을 달군다.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의 무덤가에도 배롱나무를 심었단다. 단종을 향한 일편단심의 표식이라니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여섯 개 붉은 꽃잎이 지고 나면, 여섯 개로 갈라지는 삭과 열매가 달리는데, 이는 또 사육신의 6이란다. 가보진 않았지만 인터넷에서 본 사진으로는, 서울 노량진 사육신 묘의 배롱나무는 흰색이다. 흰 색은 또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건지 그건 잘 모르겠다.

꽃잎 속에 수십 개의 노란 수술이 있다.
꽃이 지고 오랫동안 삭과 열매가 달려있다.
배롱나무 흰꽃

여름 석 달. 백일을 붉게 핀다고 백일홍. 백일홍을 빨리 말하다 보면 배롱. 그래서 배롱나무가 되었다는 재미가 보통쯤되는 그런 이야기가 있다. 목백일홍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단다. 백일홍 꽃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역시나 꽃이 정말로 100일이나 피어있는 건 아니다. 작은 공처럼 동그란 봉우리가 계속해서 나타나고 피어나는 것이다. 그렇게 여름에서 가을까지 차례로 피고 진다.


잘 몰랐을 때, 주절주절 모양새도 없이 달린 꽃이라고, 혀를 차기도 했다. 어릴 적이었다. 세상의 모든 꽃이 저마다의 이유로 피어난다는 것을 몰랐다. 여름 내내 피워 올리는 배롱나무란 존재를 얕보았겠지. 미안한 마음이 남아 오가며 볼 때마다 항상 눈길을 주게 된다.  매일매일 배롱나무 붉은 꽃 아래 여름의 전설이 자란다.




도종환 시인은 배롱나무를 이렇게 노래했다.


배롱나무를 알기 전까지는

많은 나무들 중에 배롱나무가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장 뜨거울 때 가장 화사한 꽃을 피워놓고는

가녀린 자태로 소리 없이 물러서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남모르게 배롱나무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그 뒤론 길을 떠나면 어디서든 배롱나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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