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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randol Aug 13. 2016

간이역 건너, 쪽문으로 온 8월

역대급 더위 속에 찾은 서울 푸른수목원

오전부터 날씨가 푹푹 찐다. 더위로 따진다면 올해 여름의 절정이다. 다 말려 버릴 더위에도 물주고, 정성껏 보살펴준 덕에 풀과 나무들은 싱싱하게 잘 자랐다. 시립수목원에 보금자리를 튼 혜택이다. 그래도 가까이서 보니 잎이 상한 것들이 적지 않다. 경기권에 '미국선녀벌레'가 창궐하는 바람에 수목에 피해가 크다는 소식도 있었다. 그런 영향도 있을까.


이제는 많이 알려졌지만, 서울시내에 수목원이 있다는 사실은 신선하다. 수목원이라면 <광릉수목원>처럼 큰 숲을 연상하기 때문일 거다. 비교하기에는 무리지만, 이곳도 수목원의 면모를 갖추었다. 작은 규모에 고목이나 큰 나무도 얼마 없고, 수종도 단순하지만, 서울시립수목원으로 관리하고 시민의 좋은 휴식처가 되기 때문이다.

데크에서 아래로 내려보니 보석 같은 것들이 숨어 있다.

홈페이지의 공식 소개를 보면 이곳은 서울시 최초로 조성된 시립수목원으로, '생태의섬(Eco-Island)'으로 정의하고 있다. 10만3천㎡ 부지에 푸른뜨락, 내음두루, 한울터, 돌티나라 등으로 이름짓고 테마를 나누었다. 음악회, 영화제 등 주민을 위한 행사도 다양하다. 반가운 건 관람료가 무료라는 점이고, 특이한 것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문을 연다는 것이다. 비공식적으로 내가 보기에, 대충 돌아본다면 한두 시간이면 족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관람시간은 사람에 따라서 탄력적이지 않은가. 보자고 들면 계속 머물게 되는 거고, 그렇지 않으면 금방 지루해지니까.

데크를 통해 습지 안으로 쑥 들어 올 수 있다.

주차장을 통과해 정문으로 들어서면 잔디 광장과 파라솔이 있는 광장(?)이 나온다. 커피는 팔지만 다른 음식 판매는 없다. 이곳에서부터 시작이다. 광장 왼쪽에 큰 버드나무가 자세를 잡고 있다. 아래 벤치를 가리고 남을 정도로 넉넉히 그늘을 만들어준다.  
광장 오른쪽 입구를 통해 곧장 들어간다. 들어가자마자 바로 왼쪽에 넓은 억새밭을 마주한다. 그건 그 아래가 모두 습지라는 말이다. 나무 데크 위로 갈대밭 안쪽으로 쑥 들어갈 수 있다. 데크 위 의자에 앉아서 오래도록 이야기 하고 쉴 수도 있다. 내려다 보면 갈대밭 사이로 작은 물고기들도 보인다. 물론 이 불볕더위에는 말도 안 되지. 가을날 맑은 저녁이라면 이라면, 갈대밭과 변해가는 하늘 색이 당신의 발길을 잡을 것이다. 내가 와봐서 안다.

이곳에서는 다양한 데크를 볼 수 있다.

습지 데크에서 빠져나와도, 데크를 종종 만난다. 습지라는 점과 전체적으로 평평한 땅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내가 보기에는 이는 이곳의 특징 중 하나다. 다양하고 특별한 식물을 찾아 즐기기에는 그닥 재미없을 거다. 안쪽으로 작은 개울이 만들어져 있는데, 입구쪽 습지와 연결돼있다. 앞으로 계속 가면 정자가 있는 장미원이다. 지금 장미는 없다. 그 이후에는 작은 광장과 밖으로 통하는 문이 나온다. 개울을 따라 오른다. 중간에 스탬프를 찍을 수 있는 곳이 있다. <식물도장찍기> 코너다. 흔히 수목원 탐방 증거로 사용되지만, 아날로그적인 소박함과 추억의 분위기가 풍긴다. 팔목에라도 한 번 꾹 눌러 주는 센스.

여름 속에서도 벌써 가을이 익어간다.

계절이 계절이니만큼 강렬한 색으로 주목시키는 꽃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럼 나라도...' 하며 구름처럼 모여 핀 흰색 수국이 부른다. 그외는 이름 그대로 '푸른' 투성이다. 시인 이상이 그렇게 지겨워한 온통 그 푸른색. 고흐의 그 흔한 해바라기도 잘 안 보인다. 하지만 예외는 어디나 있다. 꽃도 아닌 아그배나무 열매들이 빨갛게 매달렸다. 8월 연일 최고를 갱신하는 수은주 아래서, 결실의 가을을 예언한다. 보는 순간 누구나 잠깐 동안 자신의 가을을 생각하지 않을까. 아니라면, 생각하자. 녀석뿐만이 아니다. 산사나무를 비롯해 이름 모를 열매가 눈에 띤다. 나무들의 생각은 온통 가을에 가 있다. 여름을 맞이한 후부터, 잎과 줄기의 성장은 뒷전이었다. 그때부터 결실에 매진했다. 다른 것은 생각지도 않는 그런 몰빵 정신이 필요한데.

온실 속에는 늘 아름답고 이국적인 풍경이 살고 있다.
더워도 살자. 살고 보자.


이렇게 계속 따라 가면 온실이다. 잔디밭을 감싸듯이 은색의 온실이 자리잡고 있다. 마치 닫는 괄호 모양이다. 여름은 여기서 닫고 싶다. 온실 안에는 가드닝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교실도 있다. 원장님과 전문가가 지도한다는 안내가 붙어있다. 온실은 전체적으로 넓지는 않지만, 외계어 같은 이름의 아름다운 꽃들을 만날 수 있다. 좀전에 물줄기로 세례를 받은 더욱 신선해 보이는 이들의 환경은 바깥 세상과는 다르다. 온실을 항상 이국적이다.

항동철길이 온전히 살아있는 수목원이 되기를

푸른수목원의 또다른 특징 하나는 철로다. 그 바람에 나름 명소로 알려져 있다. 철로라지만 기차는 볼 일 없으며, 사람들이 걷는다. 철로 변에는 이상하게 추억 같은 것이 깃들어 있지 않나. 정확히 말하면 철로는 식물원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 자체가 식물원 밖에 있다. 입구 오른쪽 담 밖. 담이라야 그냥 나무로 만든 얕은 담이지만, 타고넘기에 좀 그렇다. 식물원 안에서는 철길이 보이지 않고, 철길 위로 걸으면 수목원 안에 보인다. 철로 오른쪽으로 뭔가 건물이 만들어지고 있다. 지난해에는 몰랐는데, 지금보니 그러고 있다. 뭔지 모르지만, 인터넷에 보니 '항동철길 살리기' 이런 말이 있다. 주민들이 반대하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 같다.

아무튼 철로와 수목원이 포옹할 수 없는 그런 평행선이이 아니란 건 다행이다. 철길을 따라 계속 걸어가면 식물원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공식적인 쪽문이 나온다. 작은 사거리라고 할 수 있는 이곳에서 곧장 가면 오류역 방향, 오른쪽으로 난 산길은 구로올레길. 왼쪽으로 쪽문이 마치 시골 초중학교의 뒷문처럼 괜히 정겹다. 이런 문으로 남몰래 다니고 싶어진다. 이건, 군자는 못 된다는 증거? 이렇게 해서 철길은 푸른 수목원의 컨텐츠가 되었다. 결정적으로 철로 컨텐츠의 완성은 '푸른수목원' 간이역. 언제나 철길 풍경의 최종은 간이역이었지.    

대문보다 정겨운 쪽문으로 여름은 그렇게 들어왔다.

쪽문으로 들어서 오른쪽으로 보면, 아까 말한 온실이 눈에 들어온다. 이제 대충 전체적인 그림이 독자들의 머릿속에 그려질까. 모르겠다면 홈페이지 안내도 참고. 공중에서 대충 길죽한 직삼각형의 한쪽면에 땅이 덧붙은 모양이다. 다양한 식물을 관찰하거나, 보기드문 식물을 찾아가거나, 풍경사진을 찍을 목적이라면 높은 점수를 주기는 곤란하겠다. 초반에 말했듯이 지역주민, 시민들의 안락한 휴식처로서 편안한 녹지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오전부터 동네 아주머니들이 원두막에 자리를 잡았다. 집안에 그닥 바쁜 일도 없고, 아이들은 학교나 직장으로 나갔고, 남편은 뭘하는지 상관없고. 수다를 나누다가, 깜빡 졸다가 그렇게 여름을 피한다, 세월을 보낸다. 누군가는 치열하게 여름을 보내기도 하겠지만. 뭔 대수란 말인가.

여름을 피하고, 계절을 보내고, 세월이 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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