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같지만 조금은 다른 오늘로.
은퇴 전까지 사회에서 강요된 루틴에 맞춰 생활해 왔다. 학창 시절에도,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조금의 변주는 있었으나 9 to 7이라는 산업화의 산물이 된 시간의 틀에 맞춰 생활했다. 출퇴근/통학 역시 생활의 루틴이라는 걸 예전엔 인지하지 못했다.
은퇴 후 자고 싶은 만큼 자고, 먹고 싶을 때 먹고, 해야 하는 일들이, 지켜야 하는 시간이 없어지는 걸 경험했다. 별일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며, 바쁜 일상을 보낼 때보다 더 무기력해져 가는 나를 느꼈다. 그만 트랙에서 내려와 멈춰 쉬고 싶어 선택한 은퇴였지, 이렇게 무기력한 내가 되는 걸 원한 건 아니라는 자각이 들었다.
루틴을 만들기로 했다.
누군가 또는 조직에서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삶을 위해 나를 돌보고 내 생활을 윤택하게 해 주는 루틴을 만들어 갔다. 작은 변화들, 습관들이 하나씩 자리를 잡아갔고 주말/주중의 루틴과 월 단위로 해 나가는 루틴까지 어느 정도 자리가 잡혔다.
주중의 매일은 아침에 무게가 실린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물 한 잔을 마시며 나를 깨운다. 거실/부엌의 창을 열고 식기세척기의 그릇을 정리하고 아침 식사 준비-요즘은 아이의 도시락까지-를 한다. 부엌일이 정리되면 <모닝페이지>에 글을 쓴다. 간단한 소회나 일상의 생각을 짧게 기록으로 남기다 보니 30분에서 길면 한 시간 정도 걸린다. 이후 스페인어 공부를 위해 Duolingo를 한다. 아이가 학교에 가고 나면 느지막이(?) 일어난 동거인과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뉴스를 본다. 그가 출근을 하거나 재택근무로 업무를 시작하는 시간, 9:30-10:00 사이. 그때부터 남은 집안 일인 청소를 한 후 요가 수업을 위해 집을 나선다. 요가 수업을 마치고 샤워 후 요거트를 먹는 것까지가 나의 오전 일과다. 매일 동일한 일들이 비슷한 시간대에 맞춰 루틴으로 이뤄진다.
오후엔 자유롭게 시간을 보낸다.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기도 하고 30분 정도 오침을 즐기는 날도 있다. 때때로 화장실 청소나 빨래 등 집안일을 더 하기도 하지만 정기적으로 한다기보단 필요할 때 하는 편이다. 보통 4시경이 되면 식사준비를 시작하고 이른 저녁을 먹는다. 그리고 골프 연습장에 다녀오기도 한다.
오후 시간에서 잠들기까지는 여유 있게 시간을 쓰는 편이고 10시경엔 반드시 잠자리에 든다. 요즘은 거의 전자책으로 독서를 즐기지만 잠들기 전엔 독서등을 켜고 종이책을 읽다 자는 것도 루틴의 하나다. 숙면을 위해 핸드폰이나 전자책을 보는 것은 피하고 있다.
주말의 루틴은 도서관 봉사 활동이다. 책 읽는 걸 좋아하기도 하지만 도서관의 분위기도 좋아해, 은퇴 후 시작하게 된 봉사활동이 2년이 되어가고 있다. 주말에 거의 아이의 미술수업이 있어 그 시간 동안 여유 있게 장을 보거나 아이 수업이 끝나길 기다리며 책을 읽기도 한다. 거기에 더해 오후 늦게 동거인과 골프 연습장에 간다. 주중에 비하면 다소 가볍긴 하다. 오히려 주말 식사는 간단하게 하는 편이라 집안일도 쉬면서 여유 있게 보낸다.
매일의 생활이 거의 비슷하게 채워지고 있다. 흐트러짐 없는 일상이고 건강하게 안정된 삶을 꾸려가고 있다.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는 일상이지만 그 안에서도 소소한 즐거움이 있고 매일의 기분과 작은 선택들에 따라 조금은 다르게 느껴지는 날들이다.
루틴이라는 것이 가끔은 지루한 일상을 대변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건강한 삶의 루틴은 나를 지켜주는 힘이라는 걸 안다. 직장생활의 막바지에 원치 않는 상황들에 마음이 지치고 힘든 나를 흔들리지 않게, 쓰러지지 않게 잡아준 건 매일 반복해 온 생활의 루틴이었다. 눈을 뜨면 무조건 밖으로 나가 걸었고 걷는 동안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을 다 잡았다. 그리고 돌아와 간단한 집안일을 하고 재택근무를 준비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기계적으로 해 온 일들이 그 시간을 이겨낼 수 있도록 나를 지탱해 주었다는 걸 이제 안다.
비교적 이른 나이에 은퇴한 내 일상은 앞으로 비슷하게 흘러가지 않을까 싶다. 가끔 일상에서 벗어나 여행을 떠나기도 하겠지만, 곧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거다. 단순한 삶을 살기로 한 만큼, 잘 자리 잡힌 좋은 습관/루틴으로 하루하루가 꾸려져 나가길, 그 안에서도 소소한 변화의 순간들을 즐기고 마주해 갈 수 있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