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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랑 Sep 19. 2023

35. 느긋하게, 여유 있게

09/19/2023

     A는 제주사람이다. 제주에서 자랐고 대학진학 전에는 수학여행을 제외하고 서울에 올라온 적이 없었다고 한다. 대학진학 후 서울 생활을 시작하고 맨 처음 놀랐던 것은 사람들의 빠른 걸음걸이였다고. 빠르게 걷는 사람들 사이에서 보폭을 맞추는 게 어려웠다고 한다. 뭐가 그렇게 급한 걸까 생각했지만 서울 생활이 익숙해지면서 자연스레 A도 발 빠른 사람이 되었다는 거.

수도권에서 자라 서울에서 대학/직장생활을 했던 나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부분인지라, 처음 A의 얘기를 들었을 때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뭐, 다들 바쁘게 살긴 하지만 서울과 제주가 그렇게 다를까 싶기도 했다. 그리고 그전까지는 한국인은 모두 ‘빨리빨리’라는 게 DNA에 포함된 초스피디한 민족이라고 생각했고, 그 말 한마디로 생각이 크게 바뀌진 않았었다.


미국 생활 12년 차에 은퇴 생활자가 된 지 3년.

난 어느덧 느긋하게 여유를 즐기는 사람이 되었다. 물론 항상 느긋한 건 아니고 가끔 이곳 사람들의 느린 일처리에 답답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예전처럼 초조하게 발을 구르며 기다리거나 화가 나진 않게 되었다. 거기에 더해 느린 속도로 운전하고 천천히 걷는다. 뭐, 급할 게 없으니까.

마트에서 장을 볼 땐, 카트를 밀며 천천히 구경한다. 사야 할 품목을 미리 메모해 두고 필요한 것만 구매하긴 하지만, 천천히 둘러보며 물건도 사람도 구경한다. 물론 가격비교도 여유 있게 하고.

차 없이는 ‘꼼짝 마’인 이곳에선 운전이 필수다. 출퇴근 시간에 갇혀, 그리고 퇴근 후 아이 픽업이 늦을까 엑셀을 꾹 밟고 빠르게 달리던 운전습관도, 이제 느긋하기만 하다. 천천히 엑셀을 가만히 밟아 이동한다. 여유 있게 운전하다 보니 차 안에서 듣는 팟캐스트나 오디오북도 귀에 쏙쏙 들어온다. 거기에 더해 저녁 해가 넘어가는 시간에 그라데이션으로 물든 하늘을 한껏 즐기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어제 우체국에 다녀왔다.

한국에서 보낸 소포 배달이 집을 비운 시간에 왔던 모양이었다. 다시 배달 스케줄을 잡아 요청하거나 직접 픽업을 신청할 수 있게 되어 있어, 혹시 모를 불상사-다시 빈 집에 배달 왔다가 한국으로 반송되어 버리는-를 피하기 위해 직접 픽업을 선택했다.

내 앞에 네 사람 정도가 줄을 서 있었고, 대략 1시간 정도 걸렸던 듯하다. 소포를 픽업하기까지. 예전이라면 뭐가 이렇게 오래 걸리나 속으로 불평을 시작해 앞사람의 일처리를 흘긋흘긋 보면서 조바심을 냈을 거다. 거기에 더해 소포를 찾아 픽업을 돕는 직원의 굼뜬 일처리에 분통을 터뜨렸을 테지. 물론 나 혼자 속으로. 어제는 책을 읽었다. 탁현민 저자의 <사소한 추억의 힘>. 천천히 음미하며 두 챕터 정도를 읽으니 내 차례가 왔고 소포를 픽업해 돌아왔다.


사실 미국생활 초기엔 느린 일처리가 답답하기만 했다. 인터넷 신청도, 가전제품의 A/S 신청도 일주일 정도를 기다려야 하는 게 당연했고, 관공서에 볼 일이 있을 땐 반나절 이상의 시간을 잡고 가야 했다. 한국에 비하면 모든 게 느렸으니까.

지금은 익숙해지기도 했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사회에는 저마다의 속도가 있음에 대해.

거기에 더해 한국의 빠른 일처리는 사용자에게 편리를 제공하긴 하지만 업무를 수행하는 노동자에겐 과도한 업무와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업무 환경이라는 것도.


보지 못했던 것,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들을 돌아보게 된 것도 내 마음에 여유가 생겨서 일거다.

이제 나도 제주에서의 A처럼 천천히 걷는다. A도 예전의 보폭을 찾은 듯 하고.

조금은 느긋하게, 여유 있게 주변을 돌아보는 것도 삶을 음미하는 방법이라고, 다른 이들과 함께 사는 세상을 느끼는 방법이라고 스스로 되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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