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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파랑 Mar 18. 2018

말랑말랑

<100일 글쓰기 60/100>


어제는 아주 아주 오랜만에 합정에 갔다. 예매해둔 고상지 밴드의 공연 장소가 벨로주 망원에 있었기 때문이다. 공연 시간이 오후인터라 애인과 미리 만나 점심 식사를 하기로 했다.

오래 전 함께 갔던 일본식 밥집에서 간단히 밥을 먹고, 한창 휴학하고 일하던 시절에 몇 차례 갔던 오겹살집이 아직 남아있는 것도 확인했다. 겨울이면 협곡처럼 만들어진 곳에 그늘이 지고 찬 바람이 응축되어 살벌하게 추웠던 메세나폴리스를 통과해 따뜻한 볕을 쬐며 망원까지 걸었다. 재개발 후 현대적인 고층 건물들이 늘어선 대로를 따라 크게 한 블록을 올라간 뒤, 좌회전을 해서 낮은 상가와 빌라 건물들이 좌우로 연이어지는 길을 한참 지났다.

바람이 차지 않아서 맨 손을 팔랑거려도 춥지 않았다. 손을 잡아도 되냐고 물으니, 발만 된다고 해서 당황했다. 발을 잡긴 쉽지 않으니 그럼 손 잡는 걸로 하자고 선심을 써서 바라던대로 손을 잡고 걸었다. 서쪽으로 가는 길의 풍경이 섬에서 걷던 벚꽃길과 닮아서 '그 화장실 가는 통로에 돌담벽 있던 카페 길 같다' 하고 '맞아, 난 거기도 또 가고 싶은데' 하고 이야기를 나눴다. 1km가 넘는 거리라서 타박타박 걷는 동안 소소한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전에 없이 마음도 편하고 말랑말랑한 산책이었다. 매끄럽지 않은 보도였지만 날씨가 좋은 덕분인지 오히려 리듬감이 느껴졌다.

우회전을 해서 다시 북쪽으로 올라가는 길을 타면 점점 유동인구가 많아졌다. 지도앱을 열어보니 거기가 망리단길이라고 하더라. 경리단길도 제대로 걸어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망리단길부터 경험하다니- 싶으면서도 점심 식사 시간이 지났음에도 줄이 긴 밥집들이 여럿 보여서 고개를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고 하며 신기해했다.

공연장에서 멀지 않고, 한 시간 가량 차분하게 앉아있기 좋을 카페를 골라놨었다. 다행히 자리가 있어 기다리지 않고 들어가 앉을 수 있었다. 점심 식사부터 시작해서 맞춘 듯 잘 맞는 타이밍이 날씨 덕분일까 싶었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까눌레가 있어서 연유 라떼와 함께 주문했다. '호시절'이라는 카페 이름이 주는 어딘지 아련하고 색 바랜 인상이 잘 묻어나는 곳이었다. 다른 손님들이 앉아있는 쪽과는 반대쪽의 테이블에 앉았고, 가까운 벽에 카페 내의 유일한 스피커가 설치되어 있었다. 우효와 루시드폴의 음악이 잘 어울리는 공간이었다. 어릴 때 외할머니댁에서 쓰던 그런 식기가 호시절에 있으니 소녀 감성 같은 게 그득 그득 묻어났다.

나른하게 시간이 흘러갔다. 좁은 도로의 맞은편에는 신축 빌라 건물이 있었다. 방 3개에 화장실 2개. 이 동네 신축 빌라 시세면 얼마 정도일까, 하고 이야기를 하다가 '아파트'라는 형태의 주거 공간에 대한 말로 이어졌다. 아니, 주거 공간으로써가 아닌 투자 대상으로써의 아파트에 대해. 양쪽 다 주거와 관련해서만큼은 완벽하게 독립을 하지 못한 탓인지 이야기는 꽤 오래 이어졌다.


달달하게 당분에 절여진 입을 찹찹거리면서 카페를 나왔다. 몇 걸음 걷지 않아 도착한 공연장은 4층에 있었다. 벨로주 홍대가 지하에 있었던 것만 생각하다가 4층, 그것도 지하에는 교회가 있는 건물의 꼭대기 층에 있다니 묘한 기분이었다. 예매해둔 표를 수령해 수표하고 들어가자마자 바로 옆 대기실에 있는 상지님이 보였다. 두 번째 보는 거라고 새삼 혼자 반가운 마음이 들어서 엉덩이를 들썩였다. 바이올린의 윤종수님도 구면, 그리고 오늘은 무대 말고 객석에서 보인 재즈피아니스트 최문석님도 구면. 혼자 신이 나서 공연 전후로 몇 번이나 돌아봤던 것 같다.

이번 공연의 구성은 바로크와 탱고였다. 상지님에겐 바로크 음악으로 하는 첫 공연이라고 하였고, 쓰인 바이올린과 비올라는 바로크 시기의 태를 갖고 있었다. 첼로의 경우 만들어진지 300년된 악기에 활만 바로크 활을 썼다고. 반도네온은 '반도네온=탱고'라고 생각하고 있던 탓에 당연히 남미에서 발생한 악기인 줄 알았는데, 유럽에서 만들어져 종교 음악에 주로 사용되던 것이라고. 공연 중간중간 곡에 대한 소개 외에도 연주에 쓰고 있는 악기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해주셔서 흥미로웠다.

앞서 봤던 삼청동 공연에 비해선 반도네온의 사운드가 그리 튀지는 않는 공연이었다. 놀라웠던 건 바로크 음악이라고 하면 으레 열 명쯤 되는 연주자가 필요한 거 아닐까 싶던 거였는데 다섯이 꽉 채우는 하모니가 굉장했다는 거다. 블라인드 사이로 가늘게 스미는 오후의 볕이 잘 어울리는 멜로디였다. 아주 오래 전 궁정 악사를 거느린 왕족들은 이런 기분이었을까, 이런 건 쫌 부러운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지는 탱고는 여느 때처럼 격정적이었다. 다만 이전과 다른 점은 콘트라베이스 대신 비올라와 첼로가 채워준 음역대 덕분인지 조금 더 마일드하게 느껴졌다는 정도의 차이.


공연이 끝나고 나와 걷는 동안 신이 나서 팔짝 팔짝 걸었다. 등받이가 짧고 다리가 긴 의자라서 걱정을 했던 애인도 기분 좋게 공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전에 몇 번 같이 봤던 공연들은 대개 관람 환경이 좋지 않은 탓에 제대로 즐기지 못했던 것이 아쉬웠는데 이번에는만족한 기색이 느껴져서 기분이 좋았다.

다시 고층 빌딩이 모인 곳으로 돌아간 후에는 아주 오랜만에, 페페로니에 방문했다. 아주 오래 전 합정에 열었던 페페로니, 그리고 이후 부암동에 자리했던 프렙에 이어 다시 돌아온 페페로니에. 지인의 지인이 소개한- 그 정도의 연으로 네 번쯤, 그것도 마지막으로 간 것도 못 해도 3년 전이건만 펍에 들어서자마자 '어!' 하고 알아보신 셰프님 덕분에 반쯤은 놀라고 반쯤은 반가워서 '아아아, 어떻게 기억하셨어요!' 하고 외쳤다. 최근에 조금 마시기 시작한 와인과 곁들여 다양한 요리를 맛봤고, 나도, 애인도 맛있는 시간을 보냈다. 모자람없이 기분 좋은 시간이었다. 이렇게까지 완벽한 데이트라니- 누적된 스트레스거리를 잊기에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날이었다.


일요일의 게으름을 조금 떨쳐낼 겸 동네 스타벅스로 나가는 길에 찬찬히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남겨볼까 생각했다. 새삼 나는 예전에도, 지금도 과거의 시간을 꺼내 먹으며 사는 사람이구나 싶었다. 미래에 대한 청사진이나 기대감, 설렘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많은데, 그에 비하면 나 이래도 괜찮은 걸까 싶은. 그럼에도 오늘만큼은 어제의 기억을 촘촘하게 잘라 꺼내어 보고 싶었다. 그리고 또 한 주간 힘을 낼 수 있도록 입에 넣고 아주 천천히 녹여 먹어야지. 어제부터 마음이 말랑말랑하니 기분 좋다. 이러고 내일 오열하면 너무 슬플텐데, 안 그럴 자신이 생겼다. 파란 코끼리 인형을 안고 주말을 마무리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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