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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파랑 Mar 25. 2018

섬에 살았어요

<100일 글쓰기 67/100>


스타벅스에 가서 새 시즌에 맞춰 갈아낀 메뉴판을 한참 보다가 풀리프 티라떼를 주문했다. 아예 메뉴판에서 빠진 호지 티라떼에 다시 한 번 물으며. 호지 티라떼가 돌아올 가능성은 전혀 없는 건가요? 단종 공지가 났어요. 아, 제주에는 있지 않나? 제주에선 팔텐데 맛이 다르지. 다음에 제주 가시면 드셔보세요 등등의 대화를 하다가 아쉬움을 그득 담고 돌아섰다. '제주 가시면' 에서 다음주 예정이었던 제주 여행을 다시금 생각해냈다. 한창 왕벚꽃나무가 흐드러지게 필 시기라 비싼 비행기표도 끊고 근사한 숙소도 골라 예약을 해놨었다. 사정이 생겨 급하게 취소를 하고 며칠이나 됐다고 금세 잊고 있던 차였다. 아, 별일 없어서 갔더라면 하고 많은 밥집, 카페 리스트에도 스타벅스를 꼭 끼워넣었겠구나 싶었다. 언젠가는 살았던 적도 있는 섬이, 이제는 '여행'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굳이 챙겨서 가지 않으면 영 멀게만 느껴진다.

제대로 된 첫 직장의 연수 기간 중 갑작스럽게 반쯤은 통보이고 반쯤은 제안으로 섬 근무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내려갈 날짜로부터 바로 일주일 전이었다. 개중에는 서울 근무를 희망했던 쪽이라 이틀 먼저 들을 수 있었던 이야기였다. 믿거나 말거나 '찾는 팀이 섬에 있어서 그런다'는 꿀 발린 소리와, 지금 아니면 언제 섬에서 일해보겠어 하는 뭣 모르는 호기심과 모험심 때문에 결정을 한 후 연수가 끝나자마자 바로 비행기를 탔다.

한 달여간 회사에서 빌려준 미니텔에서 지내다 연세로 집을 계약해 들어갔다. 면허도 차도 없으니 중요한 것은 회사 셔틀 노선과 마트, 편의점 접근성이었다. 집-회사-집-회사를 반복하다가 봄에는 같이 내려간 동기 중 용주 오빠의 도움으로 제법 이곳저곳으로 나들이를 다녔던 것 같다. 외로운 사람들이 제각기 회사 생활에 적응하고, 라이프스타일이 갈리면서 이후부터 평일 밤이나 주말은 오롯이 혼자의 시간으로 남았다.

살던 곳은 제주시 시내 중에서도 신제주라 불리는 오래된 동네였다. 애조로까지 이어지는 대로가 근처였고, 모앙이나 스트롱홀드 정도의 카페나 베이커리 보헴 정도를 빼면 마땅히 밥을 먹을 곳도, 커피를 마실 곳도 마땅치 않았다. 대부분의 시간을 집 거실 한켠에 놓인 카우치에 누워서 음악을 들으며 보냈다. 창문을 활짝 열고 뒷목이 아플 정도로 고개를 젖히면 파란 하늘이 손톱만큼 보였다.

무려 2년이나 살았으면서 그 시절에 남은 대부분의 기억은 그 손톱만한 하늘과 가장 자주 들었던 Midnight In Paris의 OST 앨범과 스탠드 조명 아래에서 마셨던 캔 맥주, 그리고 전 애인이 장롱 면허를 꺼내 아슬아슬하게 데려갔던 한경 해안도로의 풍력발전기 정도다. 당시에는 주말에 서울에 올라오면 섬으로 내려가는 게 죽도록 싫어서 우울해했다. 반대로 금요일 밤에 올라가는 비행기를 예매해둔 어느 날에는 공항에 타고 갈 택시가 잡히지 않아 발을 동동 구르다가 간당간당하게 겨우 탄 택시 안에서 '비행기 못 타는 줄 알았어요' 하고 엉엉 울기도 했다. 섬에 갇혔다는 생각과 고독감에 사로잡혀 괴로워하던 시절이다. 좋은 건 정말로 아주 가끔 얻어 탄 차에서 보는 거대한 풍력발전기가 다였다.

막상 서울에 올라온 후에는 섬으로 출장을 가는 일이 설레고 즐거웠다. 과거의 기억을 미화해 추억 삼는 것처럼. 섬의 모든 것에 정감을 느꼈고, 아기자기하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바다의 색이 아름다웠고, 키가 큰 나무들이 보기 좋았고, 구불구불한 도로를 따라 달리다 멀리 풍력발전기가 점점 더 가까워지면 신나서 소리를 질렀다. 더운 여름이 되면 산방식당의 쫄깃한 밀면이 생각나고, 찬 바람이 불면 한면가의 세상 깔끔한 고기국수가 생각난다. 여전히 스트롱홀드에서 구입한 까만 머그컵 두 개를 애용하고 있고, 섬에 가면 꼭 들르고 싶은 카페를 리스트업한다. 제주 한 달살이가 유행처럼 번진 와중에도 생전 상상도 못 했던 섬 생활을 덜컥 맞이했던 나의 우울은, 반은 후회와 아쉬움으로, 남은 반은 그리움으로 변했다.

같이 일하는 팀원들이 모두 서울로 올라온 지금은 출장도 요원해졌다. 출장을 가서도 늦게까지 회의실에서 머리를 굴리다 뒤늦게 편의점식으로 저녁을 떼우고 자도 좋았던 시절이, 이제는 아주 먼 일이 됐다. 다시 가면 이번에 취소한 숙소에 꼭 가야지, 하고 생각한다. 엘린이 추천해준 내츄럴 와인바에도 가야지. 월령에 가서 바다 위로 우뚝 솟은 거대한 풍력발전기도 꼭 봐야지. 왕벚꽃나무는 못 봐도 말이다. 뜨거운 햇볕에 더 촌스럽게 그을려도 괜찮으니 여름을 넘기지 말아야지. <효리네 민박2> 속의 눈 덮인 애월을 보면서도 벌써부터 더 파란 섬을 떠올린다. 설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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