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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파랑 Apr 09. 2018

부산 2

<100일 글쓰기 82/100>


“운수 좋은 여행”

제이미와의 1박 2일 부산 여행에 더없이 잘 어울리는 표현이었다. 전날 밤 체크인 때 ‘레이트 체크아웃도 가능할까요?’ 물으니 체크아웃 시간이 지나 객실로 전화가 가면 그때쯤 나와도 괜찮다는 대답을 들었다.

술이 덜 깬 채로 여유롭게 샤워를 하고 숙소 창으로 해운대 바다를 내려다봤다. 방해하는 사람이 없어서 정해진 체크아웃 시간보다 30분 늦게 나와 곧장 위에서 내려다보던 백사장으로 향했다. 첫날보다 해가 희고 맑았으며 소금기 어린 바닷바람에 머리카락이 산발이 되어도 그런대로 좋았다. 엉망인 서로의 사진을 한참 찍어가며 깔깔거리다가 나와 택시를 잡아타고 예약해둔 식사 장소까지 갔다. 기사님이 나긋한 목소리로 애인은 어쩌고 아가씨 둘이 왔냐고, 부산 뭐 볼 건 없지만 애인이랑 와야 더 재밌지 않겠냐고 물으셨다. “저희 둘이 오니까 더 재밌는 거 같아요!” 라고 빠르게 대답하는 제이미 덕분에 또 깔깔깔 웃었다.


해운대 해수욕장


엘시티 부지를 끼고 동쪽으로 가서 언덕길을 한참 오르면 도착이었다. 소리내어 말하면 혀를 말 것도 없이 부드럽게 나오는 이름을 가진 레스토랑이다. 규모는 작지만 벽 하나가 통째로 유리로 되어 있어 채광이 좋고, 오픈키친 형태에 상부에 막아둔 것 없이 트여있어서 곳곳으로 시선을 두기 좋았다. 닭과 계절채소를 구워 유자 소스를 곁들인 전채요리에 유명하다는 버섯크림소스 뇨끼, 어란 파스타를 주문했다. 맥주도 마실까 하다가 아직 전날의 숙취가 가시질 않아 물만 들이켰다. 뇨끼가 차지지 않고 부서지는 식감이었던 것 빼고는 모두 적당했다. 메뉴마다 밸런스가 2% 정도씩 부족한 느낌을 제외하면 전반적인 만족도가 높았다. 궁금해서 주문했던 전채요리가 예상보다 훨씬 맛있었던 것도 행운이었고. 애초에 만석이라고 공지가 났던 것과 달리 한 번 더 연락해본 결과 예약을 할 수 있었던 것부터가 행운이었다.


사비아


기분 좋게 가게를 나서서 언덕길을 따라 내려가는 내내 벚나무가 함께 했다. 느긋하고 평온한 무드가 찬바람마저도 ‘봄바람’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게 만드는 순간이었다.


달맞이길


해운대 보건소 앞 정류장에서 39번 버스를 타고 수영구 보건소 앞 정류장에서 내린다. 같은 정류장에서 만나 지도앱을 들여다보는 우리에게 말을 걸던 아저씨 한 분은 “그 동네에 카페가 없는데.” 라고 하셨다. 찾는 카페가 있는 곳까지 걷는 내내 우린 그 말이 떠올랐다. 정말로 카페 같은 게 있을 리 없어 보이는 오래된 주택가라서. 걷다가 홀린 듯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니 목적지의 대문이 나왔다.

주택을 개조해서 만든 곳인지 공간이 넓지는 않았다. 자리가 없어서 웨이팅해주셔야 한다는 안내를 들었는데 바로 옆에 애매하게 비어있던 자리가 있어 좌우 테이블에 양해를 구하고 앉을 수 있었다. 그 또한 운수 좋은 일. 앞에 주문이 많이 밀려있어서 오래 걸릴 거란 말을 들었지만 메뉴 또한 금방 준비되었다.


카페 견과류


2층짜리 건물을 터서 천장이 높았다. 무광의 하얀 벽과 마찬가지로 무광으로 코팅만 한 회색 시멘트벽, 옅은 고동색에 나무결을 살린 기둥이나 의자, 엷게 누런기가 비치는 광목 천 같은 걸로 톤을 맞춘 게 편안했다. 커다란 창을 통해 보이는 진한 녹색의 식물이나 돌담은 섬에서 좋아하던 카페를 생각나게 했다. 카페 이름 중 ‘견(犬)’을 맡고 있는 작은 시바견 한 마리가 돌아다니며 사람들 사이에 작은 파동을 일으키는 그런 게, 일요일 오후에 잘 어울렸다.

아쉬운 마음에 급하게 택시를 타고 광안리 해수욕장에도 발을 들였다. 이번 여행에도 광안대교의 이쪽저쪽을 다 보았다고 생각하니 새삼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 필수코스라고는 생각 안 했었는데-하고. 해가 질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바람이 서늘했다. 41번 버스에 타자마자 백팩에 넣어뒀던 후드를 껴입었다. 역 근처에서 저번에도 먹었던 비빔밀면과 만두를 시켜 아주 이른 저녁을 먹었다. 또 한 번 아쉬운 마음이 그득해져서 근처 카페에도 들렀고.


기차 시간이 멀지 않아 부산역으로 건너가는 동안 “이렇게 여행이 끝날 리 없어. 우리 지금 다른 데로 놀러가는 거죠?” 하면서 현실 부정을 해댔다. 비척비척 늦지 않게 기차에 올라 자리를 잡고 양치를 하고 나니 심하게 하품이 났다. 30분쯤 참다가 자꾸 까무룩하게 눈이 감겨서 어쩔 수 없이 한 시간 가량을 곤하게 잤다. 깨서도 아등바등 졸음을 떨치려 아무 말이라 마구 하고. 제이미가 오픈채팅 기능을 이용한 신문물을 전파해줬는데 머리를 써야해서 포기하고 멍하니 구경했다.

수서에 도착해서 각자의 집으로 헤어진 후 제이미에게서 연락이 왔다. 이번 여행의 운은 나 때문이었던 것 같다고. 전철이 안 온다고. 가랑비가 내리고 있다던 서울은 길바닥이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그럼에도 이미 그친 후라 느긋하게 집에 돌아왔다. 찬찬히 곱씹으면 왠지 아득하게 느껴지는 여행이었다. 촘촘했고, 수월했으며, 순조로웠고, 즐거웠다. 이틀 내내 강풍을 맞으며 쏘다녔으니 감기와 몸살기가 온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에 상응하는 운수 좋은 여행의 행복한 기억이 차곡차곡 쌓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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