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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파랑 Apr 12. 2018

바람개비와 고래

<100일 글쓰기 85/100>


섬에 살 때 가장 좋았던 점은 가끔 멀리 차 타고 갈 일이 생기면 가고 오는 길에 한 두 번쯤은 풍력발전기를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바람개비를 닮은, 그러나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기둥에 거대한 날개가 묵직하게 회전하는 것을 보는 게 좋았다. 신기하기도 하고, 반복적인 움직임이 나른해 보이는 것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어서. 간혹 크고 아름다운 걸 좋아한다며 짓궂게 놀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거대한 물체가 그토록 차분하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게 볼 때마다 놀랍고 보기에 좋았다. 백록담이라든가 그랜드캐니언을 볼 때 느끼는 경외감, 그것과 비슷한 차원의 감상이지 않나 생각한다. 내 몸뚱이에 비해 아주아주 큰 것이 주는 압도적인 인상과 그 스케일에서만 자아낼 수 있는 미적인 부분들이 말이다.

비슷한 차원에서 이렇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은 '고래'라는 생물체에 관한 것이다. 커다란 몸집으로 바다를 유영하는 그림자. (모든 종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물살에 휩쓸려 위험에 처한, 째꼬만한 인간을 지켜줄만큼 온화하기도 한. 수족관에선 절대 만날 수 없는, 그래서 내 육안으로는 아직 목격한 적이 없는 '고래'라는 것. 상상만으로도 꿈을 꾸는 것 같고 황홀해질 때가 있다. <신서유기 외전 - 꽃보다 청춘 위너 편>에서 Whale Watching 프로그램에 간 것을 보면서도 '저런 기분 나만 상상하던 게 아니네. 진짜 다들 저런가봐.' 하고 다시 한 번 간절하게 고래를 보고 싶어졌다. 

최근에는 고래가 나오는 다큐멘터리를 찾아 보고 있다. 그저께 밤에는 북극에 여름이 찾아와 갈라진 얼음길로 헤엄치는 일각고래떼를 봤다. 간밤에는 20여분간 바다에 수직으로 몸을 세우고 잠든 향유고래떼를 보다 잤고. 평화롭고, 평온하고, 차분하고, 고요하며 적막하기까지 한 그 기분.

어제는 마음 정리가 잘 되지 않아 자리의 잘 보이는 곳에 '고통은 각자의 몫' 같은 스스로도 속 아픈 말을 써붙였다. 이런 건 빨리 없애고 고래 사진이나 잔뜩 붙여놔야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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