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바리 '취향있냥' 클럽 _ 이용재 <한식의 품격>
2017년 09월 23일 14시 11분 독후감 제출
나는 건포도가 싫다. 자칭타칭 식탐 많고 다 잘 먹는 나인데, 건포도만큼은 싫다. 모카빵에 촘촘하게 숨어있다가 불시에 어금니 사이에서 툭 하고 터지는 그것이 싫다. 갓 구워낸 모카빵이 고소하고 달짝지근한 향으로 비강을 자극할 때도 나는 그 끔찍한 건포도 때문에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한다. 왜. 왜 나는 건포도를 싫어하는가. 잇새에 물고 조금만 힘을 줘도 아스라이 흩어지는 그것은 차라리 녹는 것에 가깝다. 녹아 사라지는 사이 폭발적으로 터지는 들척지근한 단맛. 포도의 잔상은 온데간데 없이 그저 폭력적으로 달기만 한 그것이, 나는 그것이 싫다.
사실상 거의 유일하다. 너무나 잘 먹는 내게 '싫어하는 게 있기는 해?'라고 물었을 때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것. 그렇다면 좋아하는 것은? 나는 하고 많은 좋아하는 음식이나 식재료에 대해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간혹 신나서 젓가락질을 하는 '집밥'에 감동하면서도 정작 내가 좋아하는 음식에 대해 나이브하다. 1인 가구이자 스스로 가장인 나는 대개 아쉬움을 최소화하면서 끼니를 떼울 가장 효율적인 방법에 대해 고민할 뿐이다.
그래서 <한식의 품격>의 날카롭고 신랄한 비평은 충격을 준다. 한식을 과학적이고 비판적인 시선에서 접근하는 것 자체가 낯설 뿐만아니라,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 근본적인 문제를 짚고 넘어간다는 점에서도 좋은 가이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본적인 맛과 맛을 살리는 조리법에 대한 서술을 읽다보면 한식의 성역화에 일조하고 있던 무의식이 반감을 드러내다가도 스스로의 한식에 대한 원시적인 태도와 편견에 낯부끄러워진다. 찜기에 푹 쪄서 다시 한 번 볶아내어 물끄덩하고 하릴없이 으스러지는 식감과 물 비린내가 나는 한식 가지볶음에 갇혀있던 나의 모습 말이다. 일말의 문제 제기도 없이 '가지'라는 재료는 으레 코마 상태에 가까운 그런 맛이 아니겠냐고 안이하게 생각하는 것. 크래커에 쌈장을 발라 먹는다는 재한 외국인의 이야기나 김치 블러디 메리에 경악하는 것 또한 다를 바 없다. 주위 사람들에게 '요즘 읽고 있는 책에서 한식에 대해 과학적이고 사회적인 접근을 하더라. 한식의 맛은 으레 이렇다, 전통 방식이니 이 정도로 충분하다-라고 생각하던 게 많이 깨졌다.' 라고 하면 대개는 다소 방어적인 태도로 '대체 뭐가 잘못됐다고 하는데?', '그게 뭐가 어때서? 난 잘 모르겠는데.', '난 지금 수준도 충분히 좋은데.' 라는 반응을 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한식의 맛과 조리법에 대한 과학적인 접근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도 있었다. 몇 년 전 돌아가신 외할머니는 김장철마다 집안의 불호랑이를 자처하셨는데, 동네 할머니들이 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재료 선정과 계량에 공을 들이는 분이셨다. 값이야 어떻든 할머니의 김장 레시피와 보관법에 적합한 배추를 직접 나가 고르셨고, 가을볕에 말린 홍고추를 김장 직전에 방앗간에 가서 빻아오셨다. 설탕이나 사이다와 같은 것이 끼어들 틈이 없었고, 모든 재료가 할머니의 진두지휘 하에 매년 아주 정확하고 똑같이 들어갔다. 마당 대야마다 소금물에 가지런하게 뉘여둔 배추를 새벽 두 시에 나가 한 번 뒤집고, 또 다섯 시에 한 번 더 뒤집고 하던 것도 할머니의 일이었다. 언젠가 누군가 할머니의 수고를 걱정하여 미리 한 번 뒤집어두었다가 그해 김장이 말도 못 하게 짜게 됐던 것은 웃지 못할 해프닝이다.
목표한 맛 내지는 좋아하는 맛의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오랜 실험 끝에 최적의 재료와 양, 엄격한 조리 과정을 거친다. 할머니는 본인이 생각하시는 더 좋은 맛과 김장 본연의 목표인 저장성을 높일 수 있다고만 하면 밭에 키운 홍고추가 아니라 페페론치노라도 쓰셨을 것이다. 그것이 이 <한식의 품격>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음식에 있어서도 본질에 대한 고민보다는 껍데기(패키징)가 주는 인상을 파는 시절이다. 그것은 '50년 전통 원조'와 같은 노포의 모습일 수도 있고, 인스타그램에 올리기 좋은 감각적인 프레젠테이션이나 인테리어의 공간일 수도 있다. 땡볕에 한 시간씩 줄을 서서 끼니를 해결하고 멋드러진 사진을 찍고 나와서도 어딘지 찝찝한 마음 한 구석을 끄집어내보면 그 안에는 <한식의 품격>이 제시한 프레임을 기반으로 꼬집을 것이 분명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맛은 과제다.'(p.92)라는 짧고 강렬한 문장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