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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파랑 Jan 11. 2018

'호더'라도 괜찮아

트레바리 '취향있냥' 클럽 _ 설혜심 <소비의 역사>

2017년 10월 21일 12시 30분 독후감 제출



  올해 팀 내에 ‘미니멀라이프’를 외치는 분이 생겼다. 물욕에 관해선 ‘단샤리(斷捨離)’를 실천하고—버리고 비우고 절제하며—소유보다는 실제 사용, 그리고 경험하는 것에 가치를 두는 생활을 추구한다. 정말로 좋아하는 것, 소중한 것만 남기고 보니 이제 집에서 목소리가 웅웅 울릴 만큼 비어버렸다고 한다. 바로 작년까지만 해도 맥시멀리스트를 자청하는 다른 동료들과 함께하던 분이 어떤 계기로 ‘미니멀라이프’를 실천하게 됐는지까진 모른다. 하지만 나를 ‘호더’라고까지 부르며 미니멀라이프의 이점을 설파하는 분의 주위에 있으니 매주 택배 박스를 수령하던 나 또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미니멀리스트가 될 수 있을까?


  가장 먼저 든 고민은 소비자로서 나는 주체성을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살고 있는 집은 집주인의 취향대로 풀과 나비가 가득한 녹색 벽지가 발려있다. 전 세입자가 살면서 가구를 배치했던 곳곳에는 엷은 곰팡이 자국이 피어있다. 화장대에는 온갖 기초 화장품들과 샘플들이 늘어져있고, 옷장에는 시즌별로 유행하던 아이템이 한 번 입지도 않은 것까지 빽빽하게 들어차있다. 부엌에는 처음 독립을 할 때 엄마가 챙겨주셨던 기본 살림살이와 이후 브랜드별로 세일 기간에 맞춰 사들였던 식기와 가재도구들이 어지럽게 엉켜있다. 간결하고 단순하게, 재화의 본질과 나의 진짜 욕구에 집중하기로 하고 가진 것의 절반을 솎아내기 시작했다. 자꾸 울컥 치미는 미련을 다스려가며 정리하고 버리고 비우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나니 속된 말로 ‘현타’라고 부르는 감정이 들었다. 그동안 나는 무엇을 소비한 것일까, 그것은 정말 내가 욕망한 것이 맞는가. 스스로를 비참하게 만든 포인트 중 하나는 버리고자 한 것들의 대부분이 동종 재화 라인업 안에서도 상당히 저가였다는 것이다. 소비 행위에 중독된 상태에서 치미는 욕구를 해결하고자 고르고 고른 것이 고작 좋아하지도 않는 싸구려라니. 벌이가 시원찮은 나로서는 매 순간 나의 지불능력을 실감하고 선택한 소비였을 것이다. 그야말로 베블런이 말한 ‘노동자 계급’의 전형적인 1인이 되어 가성비 따지고 저렴이를 찾다 보니 소유조차 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계속 소비하고 있던 셈이다.


  속이 쓰렸다. 최근 몇 년간 모 유제품 기업이 유통과정에서 갑질을 했다는 이야기에 여러 소비자들이 불매 운동을 벌였다. 불매 운동에 참여하고자 하면서도 마트에 가면 같은 용량, 비슷한 품질의 다른 우유에 비해 1+1 프로모션을 하는 해당 업체의 우유를 보고 갈팡질팡하게 되는 것이다. 공정무역, 착한 OO, 사회적 소비를 추구하면서 대량생산, 제 3세계의 초저임금 노동력이나 기형적인 생산-유통 구조 없이는 나올 수 없는 “합리적인” 가격과 성능이 시야를 가리는 순간들이 있다. 지갑이 얇은 소비자들은 애초부터 선택의 폭이 좁고, 대개는 그것이 본인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다. 잘한 소비인지, 잘 못한 소비인지의 판단하는 기준은 ‘가성비’로 귀결되곤 한다. 한정된 예산 안에서 주체적인 소비자가 되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까지 소비해본 경험이 없었으면 워너비 미니멀리스트도 될 수 없었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잇따랐다. 소비에 실패해본 경험이 누적되고 소유하고 있는 잉여 재화—그것의 가성비나 효용가치가 어떻든—에 대한 피로도를 느껴본 후에야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만 남길래’ 라는 시작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카드값이 부쩍 줄었다. 부디 그것이 물욕을 ‘단샤리’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취향을 파악하고 욕구에 맞는 만족스러운 소비를 한 것의 결과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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