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글쓰기> 4/100
주민등록상의 이름보다는 닉네임으로 불리는 것을 더 좋아한다. 내 이름은 남녀 불문하고 그 시절 매우 흔한 이름 중 하나였다. 심지어 성도 하고 많은 것 중 '김'씨다. 문화상품권으로 도토리 충전해가며 폭발하는 사춘기 감성을 싸이월드에 남기던 시절, 딸의 생각이 궁금했던 우리 아빠는 내 출생연도와 이름으로 사용자 검색을 했다가 손을 놓아버렸다고 한다. 중학교 때는 한 반에 같은 이름을 가진 친구가 둘이 더 있었고, 고등학교 때는 기숙사 룸메이트의 이름이 같았던 적도 있다. 그래서 닉네임으로 불리는 것을 좋아한다. 조금이라도 특별한 호칭 같다는 착각이 드니까. 최근에는 회사에서 쓰는 영어 이름이 가장 마음에 든다. 누가 물으면 좀 부끄러울 때도 있지만 발음이 예쁘다고 생각하는데다 내가 직접 고른 닉네임이라서.
카페에 앉아 맛있는 커피에 빵을 곁들이며 사람 구경하는 걸 좋아한다. 정말정말정말 좋아하는데... 커피를 잘 못 마신다. 잘 못 마시게 됐다. 오전 11시 전에 마시는 카페라떼 한 잔, 이 정도를 조금만 초과해도 바로 치사량이다. 밤새 심장이 콩닥콩닥하고 체온 조절이 잘 안되어서 힘들어하다가 결국 뜬눈으로 밤을 새운다. 마음 놓고 커피를 마실 수 있는 날은 다음날 컨디션을 좀 덜 고려해도 되는 금요일과 토요일이다. 금요일 아침에는 기분 좋게 카페라떼 라아아지 사이즈를 맛있게 원샷하고, 토요일에는 아점을 먹자마자 바로 동네 카페 어디로든 장비를 들고나가 사람 구경도 하고, 글도 쓰고 책도 읽고, 로스팅할 때 나는 고소한 냄새도 양껏 맡는다.
맛있는 맥주 한 잔에 치즈를 곁들여 먹는 걸 좋아한다. 섬에서 홀로 시간을 많이 보내다 보니 깨달은 게, 나는 타고난 혼밥, 혼술족이구나 하는 거였다. 당시 가장 좋아하던 마리아주는 삿포로 맥주, 그리고 크래커에 까망베르 치즈와 허니콤을 올린 카나페였다. 요즘은 허니콤을 공수할 데가 없어서 그냥 맥주에 치즈를 잘라먹거나 다른 간단한 안주거리를 찾는다.
집을 쓸고 닦고 청결하게 만드는 것 또한 좋아하는 일이다. 밖으로 나도는 것보다는 조용한 공간에서 충전을 하는 편이다. 어수선한 것보다는 깔끔하고 청결한 쪽이 훨씬 좋다. 책장이나 씨디장에 든 것을 모두 끄집어내 다시 정리한다거나, 오래 쓰지 않아 먼지가 끼었을 법한 그릇을 모두 다시 설거지한다거나, 쪼그려 앉아서 손걸레로 바닥을 닦는다거나. 한 번 시작하면 대청소를 하는 성미인데 그렇게 쓸고 닦고 정리하다 보면 머릿속이 한결 가벼워진다.
매 시즌 좋아하는 몇 개의 옷만 계속 입는다. 꽂힌 아이템은 색깔별로 살 때도 있다. 입고, 빨고, 입고, 빨고, 입고, 빨고. 빨래를 자주 해야 한다. 하지만 난 청소를 좋아하니까 괜찮다.
이사카 코타로, 에쿠니 가오리,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좋아한다. 모두 책 읽는 습관을 갖게 해준 사람의 영향이다. 기원이야 어쨌건, 대중적인 작품이건 아니건, 이사카 코타로의 작품은 재기 발랄하고 결말이 평화로워서 좋다. 에세이집 <그것도 괜찮겠네> 또한 이상하게 위안을 주는 글로 가득 차있었다. 에쿠니 가오리의 작품은 감정적으로 극에 치닿고 싶을 때 읽으면 사랑에 상처받은 비련의 주인공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섬세한 감정 묘사를 닮고 싶어서 좋아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은 상상할 수 있는 영역 너머에 있는 세계관의 작품일 때 와아아 하고 감탄하고 좋아한다. 작가를 닮은 글인 게 보여서 더 좋아하는 것일 수도 있다.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미드나잇 인 파리>다. 스무 번쯤 본 것 같다. OST 앨범도 갖고 있다. 헤밍웨이 캐릭터 사랑한다. 자존감이 떨어진 것 같을 때는 <예스 맨>을 본다. 도움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보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니까.
서울이라는 도시를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종로의 광화문 일대를. 고층 오피스 건물과 지붕이 낮은 고궁이 대조되면서도 묘하게 어우러지는 풍경이 좋다. 오래된 동네의 낡은 빌라 골목 사이사이 저마다 색을 가진 작은 카페와 밥집이 있는 것도. 경복궁 향원정이 보이는 자리 벤치에 앉아 바람 냄새를 맡는 것도 좋고, 국립고궁박물관 지하 전시관에서 박물관 특유의 차가운 보존제 냄새 같은 걸 맡는 것도 좋아한다. 평일 늦은 밤, 차량이 많지 않은 광화문 광장 한가운데에 서서 조명을 받고 선 광화문을 지켜보는 것도 좋아한다. 자하문 터널 너머 머얼리 불이 들어온 성곽의 위치를 더듬어 보는 것도 매일 밤의 설레는 기분을 자아낸다.
같은 여행지라도 여행의 속도를 달리하여 여러 번 방문하는 걸 좋아한다. 꼭 봐야할 스팟을 미션 클리어하듯이 모두 훑었다면, 그 다음 방문 때는 조금 더 느긋하게 보내며 도시나 마을의 숨겨진 매력에 집중한다. 구글 맵이 안내하는 최단거리가 아니어도 조금은 돌아서도 가보고, 인스타그램에선 현지어로 된 간판의 장소나 해쉬태그를 검색해본다. 좁은 골목의 정경과 여행지의 무드, 그림자마저 이국적인 모든 것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을 때까지 점점 더 느리게 여행하곤 한다.
밤하늘이 좋다. 까무룩하게 어둠이 내린 후에 드물게 보이는 별—내지는 인공위성—이라든가 건물 외벽에 반짝반짝하게 비치는 달의 흔적을 보는 것도 좋다. 겨울밤에 하늘을 올려다보다 길게 숨을 내뱉으면 하얗게 피어오른 입김에 하늘이 물드는 것 또한 왠지 모르게 밤에 온 몸이 녹아드는 것 같아서 기분이 묘해진다. 섬에 살 때 집이 공항 근처라 저녁 어스름에 놀이터 그네에 앉아 열심히 발을 구르며 3-5분 간격으로 이륙하는 비행기를 보는 것 또한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
비가 오는 흐린 아침에 늦잠 자는 게 좋다. 녹진녹진하게 이불속에 파묻혀 한없이 침대 밑으로 꺼지는 듯한 느낌이 좋다. 불가항력적으로 슬핏 다시 잠이 들었다 눈을 뜬 후에도 오디오로 좋아하는 음반을 틀어놓고 한참 빈둥대면 세상 행복해진다.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에 맞춰 Balmorhea의 음반 또는 고상지의 음반을 듣는 게 좋다. 물론 날씨와 컨디션은 이불 콕해야 하는 쪽인데 출근해야 하는 평일이라면 극도로 괴로워진다.
비만큼 눈도 좋아한다. 서울에 내리는 얼음 알갱이 가득한 눈보다는, 홋카이도 여행 때 만났던 습기가 적고 가볍게 흩날리는 그런 눈. 밝으면 폭신하고 눈썹에 걸려도 습하게 녹지 않아 덜 차갑다.
대학 졸업 후에는 줄곧 스스로를 소개할 때마다 직업과 직장에 대한 이야기 위주로 해왔던 것 같다. 생활의 4분의 3 정도는 종속되어 있는 상태이니까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얼마 전 '하는 일을 언급하지 말고 나의 취향으로 자기소개를 해볼까요?' 하는 자리가 있었을 땐 적잖이 당황하고 긴장했다. 두서없이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고 나서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는데, 누군가 날더러 굉장히 일관된 취향을 가진 것 같다고 코멘트를 했다. 나도 모르게 관통하는 무언가가 있었나 보다 하고 아직까지 미스테리해하고 있다. 그래도 이런 경험과 스스로에 대한 생각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언젠가 일을 쉬게 되더라도 덜 공허하지 않을까, 조금 더 단단하고 씩씩하게 다음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는 정말 일요일도 너무 좋은데, 일요일이 반도 안 남았다. 늦은 첫 끼니에 맥주 한 잔 곁들였더니 쏟아지는 졸음을 못 이기고 폭풍 낮잠을 잔 탓이다. 슬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