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파랑 Jan 29. 2018

내가 좋아하고 싶은 카페

<100일 글쓰기> 12/100

서촌 mk2


  휴가날이다. 딱히 특별한 일정이 있어서 휴가를 낸 날은 아니었다. 여즉 가시지 않는 몸살기를 달랠 겸 늘어지게 늦잠을 자다가 깨서는 장비를 챙겨서 어디로 갈까 고민을 했다. 집에만 있어서는 아까운 하루를 꼴딱 까먹기 십상이니까, 무언가 조금의 의지라도 만들어보려면 카페에 가서 각 잡고 앉아있는 쪽이 좋으니까. 주말에 그러하듯 역 근처 스타벅스에 가서 뭉개볼까도 생각했다. 가장 일찍 오픈하고, 랩톱을 펼쳐놓고 뭐든 하기에 적당한 높이의 테이블이 있으며, 신경 거슬리지 않는 음악과 냉난방 장치, 친절한 직원들이 있으니까. 인기 있는 여느 카페들처럼 순환률이 그렇게 떨어지지도 않아서, 스쳐가는 사람들도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다 고민은 조금 예상치 못한 이유로 방향을 달리 하게 되었는데, 역 근처에 상수도관이 동파되어 공사 중이라는 것이다. 어머나 세상에-하고 세면대 물을 틀었더니 누런 물이 콸콸콸 쏟아졌다. 그렇다면 동네를 벗어나야 할까 하는 고민이 시작됐다. 아니면 좋은 정수 필터를 쓰는 카페로, 하는 생각까지 하며. 동네를 벗어나자니 평일의 한적한 우리 동네를 언제 또 맛볼 수 있겠어 하는 마음 반과 게으름이 밀려왔다. 그럼 개중에 좋은 정수 필터...는 내가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며 라면으로 첫 끼를 때우고 일단 집을 나섰다. 걷고 걷고 걷다가 들른 곳은 오픈 직후라서 손님이 하나도 없는 mk2. 선택을 이끈 가장 큰 이유는 며칠 전 인스타그램에서 본 모 님의 생크림딸기케이크의 공이 크다. 케이크 한 조각에 허브티를 주문하고, 낯선 음악에 귀를 기울이다가 컴퓨터를 켰다. 메일함을 조금 열어본 후에는 케이크 먼저 입에 넣었다. 생크림은 느끼하지 않은 대신 달디 달다. 촉촉한 시트는 바스라질리 없어서 포들포들하게 혀 끝에서 녹는다. 딸기가 벌써 철이던가, 하는 의아함은 커다란 딸기 조각을 입에 넣고 오물대다가 생각났다. 실내의 온기는 넉넉치가 않아서 상큼 달달한 티는 금세 식어버렸다. 그럼에도 맛이 덜하지는 않아서 몇 번을 나누어 따라 오래오래 마시고 있다. 진하게 비쳐 들어오던 햇빛은 모양이 조금씩 다른 테이블과 의자의 그림자를 바닥에 꽤 오래도록 새기더니, 어느새 사라져버렸다.


  아직까지 동네에 하고 많은 카페 중에 무난한 스타벅스 외에는 마음 붙인 곳이 없다. 어떤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그저 아직 마음 붙일만치 매력을 느끼거나 익숙해진 곳이 없다는 쪽이 맞을 것이다. 과거 몇 군데 마음 붙이고 하루가 멀다하고 출근 도장을 찍던 곳이 있다. 그 중에 가장 기억에 남고 여전히 그리워하는 곳은 신촌 명물거리 안쪽 도로에 있던 'the sand'다.

  따뜻한 아메리카노가 맛있었고, 휘핑크림과 새콤한 산딸기를 곁들여 주는 초코 브라우니가 맛있었다. 2층짜리 건물은 테라스가 잘 만들어져 있어 특히 여름을 나기 좋았다. 카페 건물 맞은편의 1층에는 횟집이 있었다. 창문을 활짝 열어둔 여름의 한낮에 2층 벽에 붙은 카우치에 늘어져 있으면 횟집 수조의 물 흐르는 소리가 기분 좋았다. 조용한 휴가지에 나른하게 누워있는 것 같다는 착각을 하게 만들었다. 공간의 무드를 순식간에 바꾸어버리는 마법같은 장치였달까. 해가 진 후에는 노란 조명이 그득하게 카페 유리창을 통과해서 계절과 무관하게 푸근한 겨울 휴가 시즌을 연상하게 했다. 음악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Top100을 틀거나 미리 뽑아둔 플레이리스트를 쓰는 게 아니라 사장님의 취향이 가득 담긴 CD의 트랙을 순차적으로 플레이하는 것도 좋았다. 카운터 너머 오디오 컴포넌트와 CD가 들어있는 선반을 구경하는 것도 매번 흥미진진한 일이었다. 낯선 음악이 귀에 꽂힌 날에 1층 카운터에 가서 '방금 무슨 곡이었어요?' 하고 물으면 놓치는 일 없이 답을 들을 수 있는 것 또한 좋았다. 그러니까, 이것은 내가 마음 붙이고 싶은 카페의 면면을 기술하는 것이기도 하다.


  졸업 후 섬으로 떠나있는 동안 카페가 경영상의 문제로 곧 닫을 거란 소식을 들었다. 'the sand'를 사랑했던 몇몇 지인들은 마지막 모습을 눈에 담기 위해 들렀다고도 했다. 카페는 문을 닫았고, 이후 사장님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시는지까진 듣지 못했다. 샌드 이전에도 다른 동네에서 카페를 하셨던 적이 있다고 들었던 적은 있지만.

  섬에서 서울로 돌아온 후 서랍장을 정리하다 보니 샌드의 명함이 나왔다. 몽글몽글한 대학 시절의 추억이 그득하게 밀려와서 인스타그램에 올렸더니, 어느날 사장님이 찾아오셨다. 사장님은 내가 누구였는지 기억나지 않으시겠지만, 그래도 샌드를 기억하고 언젠가 샌드 2.0이 또 생기길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아셨으니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아, 샌드가 동네에 생기면 참 좋을텐데- 하고 생각해본다. 사장님, 제 맘 아시죠? (...)



매거진의 이전글 여름의 조각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