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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파랑 Jan 28. 2018

여름의 조각들

<100일 글쓰기> 11/100



  인스턴트 냉면을 하나 끓여 먹고 요즘 꽂힌 찰옥수수 아이스크림을 입에 문 채 컴퓨터 앞에 앉았다.

  기온이 기온인지라 단열이 잘 되지 않는 벽을 통해 외풍이 들어온다. 하필 직업병에 시달리는 오른쪽 손목에 직격으로 닿아서 어깨부터 팔까지 가려지도록 두꺼운 이불도 하나 둘렀다.


  한때는 내가 겨울을 좋아하는 줄 알았다. 밤이 길어 달도 오래 볼 수 있고, 시원하고 사그락거리는 이불에 폭 들어가 있는 게 좋았고, 마침 생일이라든가 크리스마스라든가 하는 묘하게 설레는 날도 있었으니까. 하늘하늘 흩날리다 소복하게 쌓여 주위를 온통 눈 부시게 만드는 눈도 좋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겨울을 좋아하는 줄 알았다.

  상경을 한 후로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처음 외풍이라는 걸 느껴봤다. 나는 겨울의 집이라는 곳은 바닥이 뜨겁게 지글지글 끓고 훈기가 가득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웬만큼 추우면 눈이 내려야 하고, 집앞에 쌓인 눈은 마음 좋은 누군가가 이른 새벽 말끔하게 치워주시는 그런 말도 안되는 혼자만의 생각을 하면서.

  홋카이도에서 만난 설경은 더없이 황홀했지만 혼자 사는 집은 넉넉하게 보일러를 돌릴수도 없고, 녹다 만 눈이 위험천만한 블랙아이스가 되어 수 차례 위험하게 자빠질 뻔 한다. 급하게 출근 준비를 하느라 채 말리지 못한 머리칼은 바삭바삭하게 얼어서 엉키고 상하기 십상이다. 건물 밖으로 나가면 콧물이 찔찔 흐르고 얼굴이 추위에 검붉게 변해서 순식간에 '미스 홍당무'가 되어 버린다. 며칠 집이라도 비울 새라면 보일러가 터지지는 않을까, 파이프가 동파되지는 않을까, 심지어 이제는 정화조로 이어지는 파이프가 동파되면 어떡하지-하는 끔찍한 걱정까지 한다.


  춥지 않은 계절, 조금 더 나아가 더운 계절을 상상해본다. 우드 블라인드 틈새마다 비쳐들어오는 하얀 햇빛, 창문을 열자마자 쏟아져 들어오는 지긋한 매미 울음소리, 그늘 밖으로 나가 몇 발짝 걸으면 뒷목과 날개뼈 주위로 은근하게 스미는 습기 같은 것을. 장마가 시작되면 빗물에 젖은 샌들을 찰박거리고 다니고, 우산 밑으로 바짝 당겨도 결국 물을 먹고 마는 가방끈은 마를 새가 없고, 때로 에어콘은 지나쳐서 냉방병에 걸리기도 하지만 양산이나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움츠러드는 것 없이 가벼운 몸으로 산책을 하는 건 좋다. 열대야와 모기 때문에 불안하게 잠들어도 검푸른 새벽이 일찍 물러가 느른하게 잠에서 깨 음악을 듣는 아침은 제법 선선한 편이다. 좋아하는 수박을 먹을 수 있고, 늦은 시간까지 야외에서 맥주를 마셔도 모기의 습격을 빼고는 무리가 없다. 냉면이나 빙수, 아이스크림 따위를 조금 급하게 입에 밀어넣어도 뜨거운 날씨가 든든한 뒷배가 되어주고, 그늘진 곳에 서서 가늘가늘한 바람을 맞으며 올려다보는 나뭇잎의 명암은 꽤 괜찮은 작품처럼 보인다.

  아, 여름이 오면 좋을텐데. 생각하니 갑자기 시큼시큼한 과일을 잔뜩 먹고 싶어졌다. 찰옥수수 아이스크림은 타이핑을 할 때마다 오래도록 물고 있었더니 눅눅하게 녹아간다. 마지막 한 입. 여름을 그리워하며 남은 여름의 조각을 입에 넣어본다. 음, 또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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