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글쓰기> 14/100
고등학교는 기숙학교를 나왔다. 2주에 한 번 놀토(수업이 없는 토요일)인 주의 주말이라든가 방학 중 일주일 가량을 빼고는 3년 내내 읍내에서 한참 떨어진 학교에 콕 박혀 지냈다. 평일에는 학교 정규 수업 시간이 끝나면 저녁 시간 전까지 교실에서 자습을 했다. 그리고 저녁 식사 후에 책가방과 풀던 문제지를 챙겨서 기숙사 건물 2층에 있는 '정독실'로 향했다. 반마다 구역이 있어서 번호순으로 자리가 지정되었다. 11시였나, 11시 반까지였나, 그때까지가 몸에 이상이 있지 않은 한 꼭 엉덩이 붙이고 앉아서 자습을 해야하는 시간이었다. 자습 시간만 쳐도 정규 수업 시간에 맞먹는 것이다. 아무튼 그 긴 긴 시간 동안 전교생이 꽉 들어찬 정독실은 쥐죽은 듯이 조용한 한편으로는 컨디션이 안 좋거나 심사가 뒤틀린 날이면 잔뜩 예민해져서 샤프 딸깍거리는 소리, 책장 넘기는 소리까지 소음으로 다가왔다.
당시 나는 Samsung Yepp의 MP3 플레이어를 쓰고 있었다. 들어있는 음악이라고는 가사가 전혀 안 들리는 J-Rock과 뉴에이지류가 전부였다. 전자는 간주 중에 괴성을 지르거나, 웅얼웅얼 주문 같은 걸 외우거나, 디스토션으로 귀가 지징지징거릴 정도의 곡도 많았는데 그때는 가사가 안 들려서 그걸로 충분했다. 후자의 경우에는 한 곡만 계속 반복해서 듣곤 했다. 오늘은 너로 정했다-의 느낌으로 하나를 꼭 찍어서 그것만 자습이 끝날 때까지 쭈욱.
가장 많이 들었던 곡은 열아홉살 즈음이었나, MBC 드라마 <달콤한 인생>의 OST 중 하나인 'Maybe Maybe' 다. 앨범에 정식 수록은 되지 않았으나 검색해보면 은근 팬층이 있는 곡이다. 기억에는 웹서핑을 하다 우연히 들어간 개인 홈페이지의 배경 음악으로 나오는 걸 처음 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차분하게 반복되는 우울한 멜로디의 피아노 소리, 그리고 어느 순간 치고 나오는 현악기의 협주가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풀던 문제에 집중하지 않으면 음악에 빠지기 십상이었다. 한 번 빠지면 머릿속에는 괜시리 배우 없는 드라마가 어색하게 펼쳐졌다.
자기 전 어두컴컴한 방 안 침대에 가만히 누워서 듣다 보면 천장에 스치는 희끄무레한 빛이 있었다. 기숙사 건물 뒤로 이어지는 산책로의 가로등 불빛이 흐늘흐늘하게 새어들어와 기분을 바닥까지 끌어내리고 나면 무덤덤하게 있었던 며칠쯤이 서러워지곤 했다. 훌쩍훌쩍 조금 눈물을 찍어내다 울음을 다 멈춘 후에는 다시 피아노 소리가 선명하게 귀에 들어왔다. 나의 고3은 그렇게 'Maybe Maybe'와 함께 대학 입시를 향해 달렸다.
최근에는 위너의 'ISLAND'를 가장 많이 듣고 있다. 몇 달째! "회색 빌딩 감옥 안에서 널 구해줄게" 라는 가사와 당장 머나 먼 휴양섬으로 떠나 같이 쉐킷쉐킷 몸을 흔들어야 할 것 같은 리듬에 잔뜩 취해서. 아아, 진짜 회색 빌딩 감옥 안에서 탈출하고 싶다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