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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파랑 Feb 01. 2018

조금 떨어져서 보기

<100일 글쓰기> 15/100


  입사를 한 후로 매년 연말까지 바빴다. 아니, 연말에도 바빴다. 어느 쪽이 더 적절한 표현일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거의 항상 바빴다. 우리 팀은 대개 프로젝트 마감 일정을 사업계획에 따라 스펙 없이 욱여넣어둔 스케쥴에 맞춰 역산하거나, 킥 오프 또는 바로 그 다음 미팅 때 얼추 톱밥으로 때려맞춰 정하고 리소스를 갈아넣었다. 마감 하나를 치면 바로 이어서 시작하고, 겨우 마감 하나 치면 또 다른 이슈들이 줄지어 기다렸다. 덕분인지 대부분의 프로젝트가 빠듯했고, 지쳤고, 힘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게 몸과 머리에 익어서, 성향에 잘 맞아서 좋았다. 매일 '저녁이 있는 삶 같은 걸 내가 염불해야 할 정도인가' 라는 회의감을 갖고 있으면서도 바쁜 게 좋았다. 살아있다는 기분도 들고. 투덜투덜하면서도 나는 그게 좋았다.

  2017년 12월의 마지막 주까지 빠듯하게 업무를 치고, 1월에 들어가자마자 상반기에 할 프로젝트들의 드래프트안 작성을 시작했다. 어쩌면 입사 후 내게는 가장 스케일 큰 단독 프로젝트들이 될 예정이라 설레는 마음으로 짬짬이 미리 고민을 하고 있던 터였다. 2017년 내내 스스로의 성장에 대한 고민이 많았던지라 더 활활 타올랐던 것 같다. 가열차게 준비해서 어느 쪽이든 바로 킥오프할 수 있겠다 싶던 차에 모든 업무가 홀딩되는 날벼락이 쳤다. 홀딩되어 있는 동안도 나는 여전히 기대감에 가득 차 전투력을 불태웠다.


  조직 구성이 변하고 상위 전략이 정비되면서 어쩌다보니 담당자도 바뀌고, 프로젝트의 목표도 조금씩 바뀌었다. 아예 엎어진 프로젝트도 있었다. 시작이 반이라는, 아무데나 갖다 붙이기는 너무 엄청난 그 말에 기대어 허풍을 보태자면 상반기 내 업무의 절반이 무용지물이 된 것이다.

   와중에 업무 바운더리라든가 협업 프로세스가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서로 서로 낯선 동거가 시작됐다. 설레는 마음이 더 컸던 와중에 막상 일을 시작하니 미묘한 우울감이나 상실감이 고개를 들 때가 있다. 해가 바뀌는 걸 체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줄곧 머릿속으로 고민하고 그림을 그려나가며 준비해둔 것들이 '덧붙이는 의견'이라는 이름을 달아 디밀고서야 결국은 또 쓰이는 상황이 오면 이걸 좋아해야 하나 어째야 하나 갈팡질팡하게 되는 것이다. 어, 그냥 뭣 모르고 뒤로 밀려난 꼴인가 하는 치졸한 생각이 스물스물 튀어나올 때면 스스로 아이고, 덜 자랐네 하고 자조한다.


  지독하게 낯선 과도기다. 빠르게 적응해버리겠다-하고 다른 의미에서 전투력을 불태워본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똑같이 주체성을 갖고 열심히 해야지, 하고. 그럼에도 왜 이리 낯설고 어려울까. 빨리 적응하고 싶다. 빨리 적응해야지.

  팀원 중 누군가 스스로를 프로덕트나 프로젝트와 너무 동일시하지 말라고 조언을 한 적이 있다. 누군가는 회의 때마다 의지와는 무관하게 과열되는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며 '소중하지 않다' 하고 되뇌이려 노력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어쩌면 최근의 소모적인 감상들은 모두 그 '소중하지 않다'를 하지 못해서일지도 모른다. 마음가짐을 재정비할 때다. 조금 떨어져서, 이성적으로, 나와 동일시하지 않고- 뭐, 그래도 쬐끔만 더 속상해하는 건 괜찮지 않을까 하는 미련도 어서 날려버리고. 2월부터는 조금 더 씩씩하게, 만족스럽게. 제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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