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글쓰기> 17/100
같이 살던 sis가 전출신고까지 해가며 본가로 떠난지 근 한 달이다. 자취경력이 꽤 되는 편이라고 해도 혼자 살기에는 너무 넓은 집에 매일 밤 보일러가 덜 들어온 찬 바닥에 쪼그려 앉아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려니 새삼 외롭다. 퇴근만 하면 어딜 가든 쫓아다니며 종일 있었던 일을 빠짐없이 읊으며 말을 걸던 sis 없으니 혼잣말이 늘었다. 대작은 안 해줘도 옆에 앉아서 '엄마한테 이를 거야' 하던 잔소리가 안 들리니 혼자 마시는 맥주도 이제 맛이 덜하다.
요즘은 이럴 때 부를 동네 친구가 있으면 참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한다. 그나마 주변 인맥을 죄다 훑었을 때 대학 동기 북촌 사람은 말 그대로 북촌에 산다. 서촌 사람이 북촌 사람을 만나서 북촌의 맥주집을 찾아가려면 전철도 애매하고 버스도 애매하다. 결국 경복궁 주위를 빙 돌아 한참을 걸어가야 한다. 출근길 마을 버스에서 마주친 적이 있는 옆 팀 이본은 이미 같이 사는 짝꿍이 있는데다 사실 통성명 외엔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다짜고짜 "보현님, 맥주 한 잔 하실래요?" 라고 하기에는 이런 실례가 또 없다. 하필 최근 제일 죽이 잘 맞는 회사 친구 제이미는 멀고 먼 회사보다 더 먼 동네에 살고 있다. 이럴 때면 인간 관계에 노력하지 않는 내 자신이 이렇게 얄미울 수가 없는 것이다.
섬에 살 때는 바로 뒷 블록에 입사 동기 둘이 살고 있어서 출퇴근길에 마주치는 건 예사고, 내키면 주말에 같이 장을 보러 가거나 같이 밥을 먹고 나들이를 가기도 했다. 갑자기 네 캔에 만 원 하는 편의점 수입맥주를 사서 "무한도전에 맥주 콜?" 하면 문을 열어줬고, 혼자 해결할 수 없는 집안일이 생기면 손을 보태달라고 연락을 해도 금방 달려와주었다. 뭐, 이 사람들 다 애인이 생긴 후에야 사정이 달라졌지만 아무튼.
초등학교 때 피아노 학원 가기 전 근처 놀이터에서 놀다보면 마주친 친구랑 "이따 끝나고 떡볶이 먹으러 갈까?" 라고 제안할 수 있던 시절처럼 그냥 동네에서 우연히 마주쳐서도 커피? 하면 아니, 맥주! 하고 세수하고 어디서 봐-라고 편하게 만날 수 있는 친구가 생겼으면 좋겠다. 생긴지 몇 달된 폴란드식 핫도그 스탠드에서 핫도그 하나씩 물고 느긋하게 걷다가 맥주 파는 책방에서 졸릴 때까지 수다를 떤다거나, 주말 이른 아침에 눈꼽만 뗀 채 볼캡을 눌러쓰고 급하게 곰탕집이나 굴국밥집에서 한 끼 후루룩 해치우는 것도 좋다. (북촌 살 적, 북촌 사람이랑 그랬던 것처럼.) 경복궁 살구나무에 꽃이 폈다더라-하면 매표소 앞에서 각자의 신분증을 내밀고 종로구민 할인 받고 입장도 해보고 싶고, 시장에서 숙주 천 원어치—말이 천 원어치지 까만 비닐봉지를 가득 채운 양의—를 반씩 나눠서 헤어져 보고도 싶다.
어제는 sis가 오랜만에 집에 돌아왔다. 오늘은 엄마까지 놀러 오신 덕에 집에 복닥복닥해졌다. 며칠 후에는 곧 대학에 들어가는 사촌동생이 오티 뒤풀이 때문에 와서 자고 갈 거란다. 요즘 되게 외로운가보다,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