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글쓰기> 19/100
고교 진학은 집에서 차로 세 시간 떨어진 곳의 기숙학교로 했다. 어느 날 신문에서 개교 광고를 본 아빠의 '입학 시험 성적이 상위 50%에 드는 입학생들은 미국 아이비리그 투어 시켜준다는데?' 하는 제안에 시험을 봤다 덜컥 가게된 곳이었다. 입학 후 보니 나는 같이 입학한 애들과 출신지, 출신 학교, 출신 학원만 다른 게 아니라 '서울말'—에 가까운 사투리—을 쓰는 재수 없는 이방인이었다. 내게 우호적인 것은 담임 선생님밖에 없던 처음 몇 달, 그리고 생활과 성적 모두 안정이 된 그 후에도 나는 감정적인 결핍을 많이 느꼈다.
문학 시간이었던가. 1시간 후에 지구가 멸망한다면, 혹은 전쟁이 난다면 어떻게 할래? 라고 선생님이 질문하셨다. 다른 무엇보다도 나는 가족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양쪽에서 동시에 출발을 해도 나는 결국 가족들을 보지 못한 채 경부 고속도로 한복판에서 멸망과 함께 사라질 수밖에 없는 가정이었다. 학교에서 자습을 해야했던 어느 주말 밤, 나를 보러 차를 끌고 먼 길 오셨던 우리 부모님은 돌아가는 길에 졸음운전으로 그대로 목숨을 잃을 뻔 했다. 난간 너머로 차가 넘어가기 전 아빠가 악몽을 꾸다 소리를 지르며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그 때 타셨던 차는 차체 오른쪽이 죄다 긁혔고 그대로 폐차되었다.
고등학교를 낯선 곳으로 갔던 것처럼, 나의 첫 직장 또한 지독하게 낯선 곳이었다. 입사 연수 기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 나는 나를 원한 부서가 아주 먼 곳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가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요? 그럼 다른 부서를 다시 찾아봐야죠. 그렇게 나는 5일 후에 섬으로 날아가 첫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직장과 낯선 생활환경, 양쪽 모두 잘 적응하는 것은 적지 않은 스트레스였다. 약 4개월 후 일요일 밤, 다리가 불편해서 병원에 입원해 계시던 외할머니가 갑자기 위독하시다는 전화가 왔다. 이미 육지로 가는 비행기가 있는 시간을 한참 지난 늦은 밤이었다. 몇 번의 고비도 잘 넘겼었으니 이번에도 괜찮을지 모른다던 덧붙이는 말이 무색하게, 다음날 아침 출근 준비를 마치자마자 부고가 전해졌다.
가까운 가족의 첫 죽음이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앨리스에게 전화했고, 앨리스는 내 대신 회사가 가족을 잃은 직원에게 해줄 수 있는 것들을 알아봐주었다. 택시, 비행기, 버스, 또 택시. 외할머니의 빈소로 가기까지의 여정이 멀었다. 그 사이 회사에서 지원해준 장의용품과 조의화환이 나보다 먼저 도착해있었다. 조문객들은 회사 로고가 떡하니 박힌 일회용 종이컵이며 그릇, 질 좋은 나무젓가락 따위를 보고 큰 손녀가 참 좋은 회사에 다닌다고 한 마디씩 거들었다. 며칠 내 비통해하시던 외할아버지는 모든 절차가 끝난 후, 힘겹게 웃는 얼굴로 그래도 손녀딸이 할머니 가는 길 마음 편하게 많이 도왔다고 손을 잡아주셨다. 손자 손녀 중 가장 외할머니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던 나는 그 전 몇 달간 외할머니 얼굴 한 번 못 보고, 돌아가신 후에도 기껏 회사에서 챙겨준 것 밖에 없다는 생각에 죄스러워 또 한참을 울었다.
친할머니는 말기 암을 늦게 발견한 탓에 치료도 못 하고, 돌봐줄 사람이 마땅치 않아 요양병원에 입원하셨다. 가족들이 곁에서 살필 여력이 되지 않아 입원을 시켰다-라고 보는 쪽이 더 적절할 것이다.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약 한 달 전 병문안 때다. 그마저도 독감 유행 때문에 가족들도 모두 나가라는 불호령을 듣고 금방 내쫓기었다. 할머니는 활동적이고 정정하고 잔병치레도 없는 분이셨는데, 결혼 후 회충 때문에 배앓이를 하니 시어머니가 '담배를 피우면 회충이 다 죽는다' 하는 말에 그때부터 담배를 피셨다고 한다. 급속도로 쇠약해지시기 얼마 전 의사가 '할머니, 안 끊으시면 진짜 죽어요' 라고 말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껏 피셨을지도 모른다고 아빠는 종종 말씀하셨다.
몇 주간 매일이 고비였다. 언제 돌아가실지 모른다, 당뇨 때문에 쇼크가 와서 위험하다, 중환자실에 들어가셨다, 아직 잘 모르겠다, 그래도 다시 괜찮아지신 것 같다 등등. 심란하고 어찌할 바를 몰라 하던 시기들이 스쳤다. 엄마와 sis가 내려가고, 또 다시 빈 집에 돌아와 늦은 저녁을 먹는 동안 연락이 왔다. 한두 시간쯤 후면 돌아가실 것 같다고. 설마, 하면서도 장의용품 지원 요청서를 준비하고 첫 차를 탈 수 있도록 짐을 쌌다. 짐을 싸고 집을 정리 하는 내내 생각했다. 대체 한두 시간쯤 후-라는 건 누가 알고 이야기 하는 걸까. 의사들은 보면 아는 걸까, 그들이 생명을 주관하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아는 거지. 갑자기 억울한 마음이 치밀었다.
sis가 아빠가 급하게 다시 병원으로 가고 계시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늘어져 있는 마른 빨래를 잠시 개고 났더니 아빠가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와있었다. 첫 차는 아침 6시. 이르게 시작해 바쁘게 보낸 하루의 피로가 온몸을 덥치지만 잠들 수가 없다. 결국 이번에도 기껏 회사에서 지원해주는 장의용품 밖에 없게 되었다. 머리가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