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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파랑 Feb 07. 2018

일상 복귀

<100일 글쓰기> 21/100


  간밤에 본가가 있는 동네에 눈이 왔다. 갑자기 쏟아진 눈 때문에 도로에 발을 내딛으면 사부작거리는 소리가 났다. 늦은 시간이라 다니는 차도 몇 없어 녹기 전에 계속 쌓이는 눈 때문에 차가 조금씩 미끄러졌다. 치미는 짜증 때문에 나는 장례식장에서 집까지 가는 내내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sis는 혹여나 운전 중인 엄마의 집중을 방해해 위험해질까봐 "그만 좀 울어!"하고 성을 냈다. 마음이 쓰여서 같이 나오던 아빠는 결국 부채감을 떨치지 못하고 다시 빈소로 향했다. 아빠는 밤새도록 제일 큰 형님, 그리고 장손 내외와 술잔을 기울였다고 한다.

  고생했다고 인사치레를 하는 얄미운 사람들의 말은 대충 흘려 들었다. 알바비 챙겨줘야겠다는 소리를 하면서도 제 앞으로 돌아갈 부조금은 한 푼도 내놓을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애초에 '알바비' 라는 표현을 고른 것부터가 끔찍했다. 그들에게는 고인의 손녀딸이었던 내가 시간당 8천원씩을 주고 몇 시간씩 고용했던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안에서 집안 어른들이 이런 저런 문제로 큰 소리를 내는 동안 나는 아무도 지키지 않는 빈소에 서 있었다. 식혜 캔 하나를 따서 몇 시간동안 축인 적 없는 입에 물고 영정 사진을 찬찬히 들여다봤다. 작은 할머니는 손자, 손녀들 중에 그래도 할머니가 업어 키운 건 너 하나였다며 내 손목을 잡고 사탕 하나를 들려주셨다. 너무 어린 시절이라 기억나지 않아서, 내가 아는 것은 나를 마냥 업고 시장에 가거나 게이트볼을 치러 가거나 나를 외할머니에게 맡겨두고 놀러 나가셨던 그런 이미지가 강했다. 실질적으로 나를 살뜰히 챙기고 키운 건 우리 엄마도 아니고, 팔 할 이상이 외할머니와 이모들이라고 생각하는 터라 할머니에게서 '키워준 사람의 정' 같은 걸 떠올리기는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최소한 내가 기억하는 한에서 할머니는 다른 손자, 손녀들에 비해 늦게 태어나 늦게 자란 나나 sis를 퍽 예뻐하는 눈으로 보셨었다.

  그런 애정은 차치하고라도, 어쨌든 가족 구성원의 죽음, 부재는 마음을 약하게 만든다. 가족이라면,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변함 없는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을 거라 믿었으니까. 나이브한 생각은 할머니를 둘이나 떠나보내고도 자랄 줄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식혜를 반도 못 마시고 한참 울었다. 안에선 격앙된 목소리가 흘러나왔고, 새 언니와 가장 큰 언니는 서럽게 우는 나를 안고 어른들이 좋은 모습을 못 보여서 미안하다며 대신 나를 달랬다.


  엄마는 채 3시간도 자지 못 하고 다시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아빠는 '염 하던 것보다 화장하는 게 훨씬 무서웠어요' 라던 내 말을 기억했는지, 아무래도 좀 쉬다 출근 준비해야하지 않겠냐며 오늘은 집에 머물게 했다. 밤새 후드려 맞은 것 같은 컨디션으로 한참 악몽을 꾸다 느즈막하게 잠에서 깼다. 간밤에 마무리 정리를 하며 챙겨왔던 장례식장 반찬으로 대충 끼니를 때우고 부조금 봉투에 적힌 조문객의 이름과 소속을 시트에 옮겨 적었다.

  혼자 버스를 타고 올라오는 길에 엄마와 아빠에게서 따로 전화가 왔다. 엄마는 꼭 쌍화탕이라도 먹고 일찍 자야 병이 안 날 거라고 하셨고, 아빠는 그래도 내가 좀 더 참고 이해하고 한 발 물러서야 상황이 나아지더라 라는 씁쓸한 말을 하셨다. 터미널에서 집까지 오는 전철은 퇴근 시간과 맞물려 평상시의 퇴근길만큼이나 붐볐다. 한강 수면에 비치는 노을은 여전했고, 서울의 공기는 첫차를 타러 가던 때의 새벽에 비하면 차라리 따스한 편이었다. 지나친 비일상으로 가득했던 3일은 평소보다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시간적으로든 감정적으로든 모든 게 짙게 압축되어 곱씹어 보면 숨이 턱턱 막혀온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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