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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파랑 Feb 14. 2018

초콜릿은 없어요

<100일 글쓰기> 28/100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을 때는 방어기재처럼 지독하게 달 거나 매운 걸 찾게 된다. 단 것은 먹다 보면 머리가 아프고 매운 건 먹고 나서 죽을 것 같다. 작은 고통은 큰 고통에 가려지는 것처럼, 양쪽 다 스트레스를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압도하는 게 있다.


  고등학교 때는 수험의 스트레스를 단 것으로 풀었다. 유치원 때부터 김치를 씻지 않고 먹을 줄 아는 어린이로 길러졌으므로 매운 맛에는 비교적 내성이 있는 편이다. 게다가 산골짜기 기숙사에선 매운 것을 구할 곳도 마땅치 않았다. 산을 타고 한참 빙 돌아 배달 아저씨와 접선하여 겨우 먹는 지코바 치킨 정도 외에는. 그래서 대개의 경우는 단 것이 해결책이었다.

  기숙사 방 책상 아래에는 커다란 종이 박스가 하나 있었다. 오예스, 찰떡쿠키, 찰떡파이, 몽쉘카카오, 엄마손파이, 마가렛트, 쿠크다스, 초코하임, ABC 초콜릿 등등 달다구리를 항상 가득 채워놨다. 당시에 급식을 먹으면 이상하게 계속 체하는 느낌이라 밥을 잘 못 먹었었다. 특히 고기류는 거의 손을 대지 않고 밥알을 세듯이 천천히 먹고 살이 쪽쪽 내렸었다. 그걸 메울 목적으로 먹은 게 과자는 아니었지만, 지독한 정신적 허기와 감정적 동요로 인해 기숙사 방에 잠깐이라도 들어가면 최소 다섯 봉지쯤은 입에 욱여넣고 나와야 직성이 풀렸다. 덕분에 수능을 보기 전 3개월 동안은 이전에 쪽 빠졌던 체중이 급작스럽게 10kg이나 늘어 최고치를 찍기도 했다. 친하게 지냈던 남자애들은 장난 반 걱정 반으로 '어째 얼굴이 맨날 더 똥그래지는 거 같다'라고 하기도 했다.

  한 번은 키세스 초콜릿 1.5kg짜리 인터넷 쇼핑몰에서 주문한 적이 있다. 주중에 배송을 받아서 금요일 밤 늦게부터 까먹기 시작했다. 와구와구.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방바닥에 앉아서 하나를 까서 입에 넣고 오독거리면서 또 하나를 깠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3분의 2를 넘게 먹어치운 상태였다.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찝찔한 기분과 바닥을 치는 자기효능감에서 비롯된 '현타'가 치고 올라왔다. 룸메이트는 이미 잠든 후였고, 나는 스탠드를 끄고 공들여 양치를 하고 2층 침대로 꾸물꾸물 올라갔다. 가만히 누워서 급하게 주워먹은 단맛이 선사한 흥분 때문에 오래도록 눈알을 또록또록 굴리다 겨우 잠들었다.

  다음 날에는 엄마, 아빠가 방문하셨다. 오전 자습을 하는 동안 발가락이 가려웠다. 발바닥 쪽도 아니고 희안하게 오른쪽 엄지 발가락 끄트머리가. 빨갛게 물집처럼 뭔가가 올라왔고 자꾸 간지럽고 속이 아프기까지 해서 엄마에게 이야기를 했다. 엄마의 성화에 차를 타고 읍내로 나가 피부과에 들렀더니 음식물 때문에 생긴 급성 알러지로 보인다는 진단이 나왔다. 초콜릿을 1kg 쯤 먹었다고 실토를 하자 엄마는 혀를 끌끌 차는 한편으로는 나를 안쓰러워하셨다.

  그때 잡힌 물집은 약 일주일 후에 사라졌다. 그 후에도 나는 매일 과자를 먹고 종종 앉은 자리에서 초콜릿을 연달아 여러 개 먹었다. 수능 바로 전날까지 계속. 지금도 일을 하다 잘 풀리지 않을 때는 지독하게 단 게 생각난다. 수험생 시절처럼 막무가내로 초콜릿을 입에 밀어넣을 때도 있고, 뭔가 감정적으로도 주체가 잘 되지 않는 것 같은 날이면 늦은 밤에 매운 라면에 맥주를 곁들이고 잔다.


  발렌타인 데이라고 한다. 이제 내 생일도 잘 기억나지 않는데 상술이 끼어들어 기념하자고 드는 날은 더더욱 의식에 스며들 틈이 없다. sis는 왜 초콜릿 선물을 준비하지 않았냐고 물었다. 정작 초콜릿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다시 한 번 수험생의 처지가 된 아이이니 괜히 마음의 허기를 느껴서 물었는지도 모른다. 초콜릿은 차치하고 용돈을 조금 쥐어줬다. 좋은 언니인 척을 하며. 밤에 독서실로 데리러 오라는 요청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맥주를 한 캔 마시고 집을 나서면 적당히 시간이 맞을 것이다. 휴일의 첫 날이 적당히 저물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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