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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파랑 Feb 27. 2018

동네 산책

<100일 글쓰기> 41/100


  더운 여름날 동네에 처음 집을 구하러 왔을 때 '여기가 <건축학개론>에 수지가 살던 집이에요' 하고 알려주는 공인중개사 분을 따라 골목골목을 헤매고 다녔다. 몇 년이 지난 후에는 서촌을 사랑하는 김종관 감독님의 여러 작품에도 단골 등장했고, 지난 겨울에는 정봉씨(본명을 모르겠다)가 집 근처 편의점 앞에서 촬영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오래된 빌라와 한옥, 좁은 골목이 이리저리 휘어지는 우리 동네는 그만큼 차분하고 소박한 인상이 있어 걷기에 나쁘지 않다.

  이사를 오기 전에는 경복궁 서쪽 담장을 따라 보안여관과 메밀가게, 영추문을 지나 유니세프 건물에 이르기 전 삼거리에서 좌회전을 하곤 했다. 그러면 좌측에는 빙그레 슈퍼가 보였고, 우측에는 mk2가 보였다. 영추문의 '추'처럼 가을에 걷기에 낙엽과 적당히 은은한 은행 냄새가 나 딱 좋은, 그런 길이었다. 서촌으로 이사를 한 후부터는 등교든 출근이든 지나갈 일이 없는 길이 되고 말았지만.

  이후에 맛을 들인 길은 청운동 주민센터 맞은편 새마을금고 옆으로 빠지는 필운대로다. 아주 굵직한 곡선을 그리는, 적당한 오르막과 내리막의 리듬감이 있는 길이다. 좌측으로는 규모 있는 건물들의 높은 담장이 솟아있고, 아름드리 나뭇가지가 쏟아져내릴듯 햇빛을 받아 찰랑거린다. 볕이 좋은 오후에 걸으면 더없이 좋은 그 길은 통인시장 뒷골목까지도 이어진다. 집에 가려면 거기서 필운대로 산책을 멈춰야하니 사직단까지 내려가는 일은 거의 없다. 가끔은 효자베이커리에 들러 내 주먹 두 개만한 크기의 카스테라를 사고, 푸른마트에서 흰 우유를 한 팩 사서 집에 돌아오기도 한다. sis가 집에 있을 때는 영광통닭에 들러 닭모래집과 웨지감자 튀김이 함께 곁들여진 후라이드 치킨을 포장해오기도 한다.

  동네 산책을 한지가 오래됐다. 더듬더듬 기억을 떠올리니 새삼 한낮의 동네 풍경이 그리워진다. 방학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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