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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파랑 Mar 10. 2018

악필

<100일 글쓰기> 52/100

이번 주 내내 보드에 글씨 쓸 일이 많았다. 팀내에 악필이라고 소문이 나있는데다 실제로도 굉장한 악필인데, 내 글씨와 초면인 분들도 회의에 참석하실 예정이라 나름 신경써서 썼다. 회의 시작하기 전에 공들여 천천히 쓰고 그리고. 시작한 후 틈틈이 메모를 할 때도 조심조심 썼는데 한 시간 두 시간 가다보니 어쩔 수 없이 개발새발이 되고 말았다.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글씨 점점 망가지는 거 봐' 하고 웃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엄마 아빠는 굉장히 어른스러운 명조체를 구사하신다. 그에 반해 나나 sis는 글씨가 덜 여문 아이 글씨 같은데다 딱히 태가 있는 것도 아니다. 누굴 보여주려고 쓰는 글씨도 아니고 과제 제출 같은 건 점점 컴퓨터로 문서 작성을 하면 되니 글씨는 발전할 줄을 몰랐다. 엄마는 '어릴 때는 그나마 괜찮았는데' 하고 아쉬워하셨다. 대학 때는 마지막 학기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강의 때 도톰한 옥스포드 노트에 펜으로 필기했다. 매일 쓰다보니 꽤 그럴듯해져서 엄마 아빠처럼 명조체를 쓰게 되었다.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혹은 세련되고 맵씨있는 글씨는 아니어도 어디 내놓기에는 나쁘지 않아 보였다.

일을 시작한 후로 제일 곤란할 때는 보드에 글씨를 쓸 때다. 손글씨가 마음처럼 안 나오는 것은 급하게 굴어서라고 어디선가 들었다. 생각은 흐르는 속도를 손이 따라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의 간극이 흐물흐물한 글씨가 되고 마는 것이다. 화이트보드의 미끄러운 표면과 축축한 마카 끝이 더해지니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다.

작년 가을에 팀에 선물로 들어온 도서 중 '예쁜 손글씨 쓰기'인가 하는 제목을 가진 것을 누가 내 책상에 올려주었다. 한 번도 열어보지 않고 공용 책장에 도로 꽂았던 기억이 난다. 귀여운 글씨체를 갖고 싶다. 그러면 노력을 해야하는데, 그 욕망이 실천에 옮길만큼 진실되지 않은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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