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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파랑 Mar 11. 2018

봄이 오면

<100일 글쓰기> 53/100


오랜만에 내 방에서 잤다. sis가 출가를 한 후로는 줄곧 훨씬 따뜻한 sis 방에서 자곤 했는데, 어제는 엄마 아빠가 놀러오셔서 내 방으로 돌아갔다. 겸사겸사 방에 정리할 것도 있고, 날도 풀렸고 해서 걱정이 되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우드 블라인드의 방향을 뒤집어 은은하게 햇볕이 스며들게 하고, 미니 컴포넌트를 켰다. 영화 <캐롤>의 OST가 흐르고, 잘 보이지 않는 눈을 꿈벅꿈벅하며 기지개를 켰다. 외풍이 적고 햇빛이 잘 드는 아침이었다. 꿈이 흐릿한만큼 깨지 않고 푹 잤고, 컨디션이 많이 좋아졌다고 느꼈다. 보들거리는 극세사 패드에 등허리를 부비고 다리를 휘적일 때마다 따라서 사그락거리는 이불의 감촉이 좋았다. 눈꼽을 대충 털고 인공눈물 한 방울씩을 넣은 후 다시 드러누워 '캐롤' 앨범 쟈켓 사진을 한참 들여다봤다. 주인공들은 겨울의 한 가운데에서 처음 만났지만 쟈켓 사진은 한없이 따스해서 창 밖의 봄보다 더 푸근해보였다.

엄마가 해주신 김밥의 꼬다리만 몇 개를 집어먹고 빨래를 갰다. 날씨가 건조해서 자고 일어나면 목구멍이 따가운 것처럼 간밤에 널고 잔 빨래들도 보송보송하게 말라있었다. 샤워를 하고 나와도 그리 춥지 않았다. 여즉 입술은 까슬거려도 손등은 전보다 덜 버석하다. 머리카락을 말리고 옷을 주워입고 장비를 챙겨 밖으로 나왔다. 볕이 좋아서 일부러 느리게 걸었다. 섬유유연제를 넣어 돌린 후 볕에 잘 말린 면을 닮은 그런 햇빛.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춥지 않아 보였고, 오히려 화려한 금박 문양들이 눈부시게 예뻤다. 사람들 사이를 걸으며 난 목에 두른 머플러를 조금 더 단단히 맸다. 아직은 그늘이 시린 시기니까.

양껏 봄을 맞이하고 싶다는 생각에 벚꽃 여행을 가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마음을 먹은 것은 조금 더 과거의 일이다. 집중할 여유가 없어서 문득 떠오를 때 틈틈이 찾아보았다. 섬국에 가야지, 하고 찾다가 대도시는 패스, 최근 3년 내 가본 곳도 패스- 그러다 보니 남은 곳은 항공편이 마땅치 않거나, 가서도 차를 렌트하지 않으면 다니기 어려운 곳만 남았다. 결국 돌고 돌아 선택은 섬국 대신 그냥 '섬'이 되었다. 왕벚꽃나무가 흐드러지게 꽃망울을 터트리는 곳. 시간의 속도를 셈하고 있다. 빠른 듯 하면서도 느려지고, 또 언제 가나 싶다가도 눈 깜짝할 새에 달을 마주하는 매일을 살면서.

고개를 들었더니 보이는 것은 'HELLO SPRING TEA LATTE' 라는 신상 음료가 표시된 메뉴판이다. 마음이 산란하다. 일을 시작해야하는데 좋아진 컨디션만큼 그간 억눌렀던 많은 잡념이 밀려온다. 그저 이게 다 봄 기운이 물씬 풍기는 탓이려니, 하고 조금 더 음악이나 들어봐야겠다. 실컷 듣고 나면 그 다음엔 정말로 일에 집중할 수 있겠지 하는 기대감을 갖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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