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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랑 Oct 03. 2022

자꾸만 1인극이 될 때

이 삶이 연극이라면 내게도 분명 배경이, 소품이, 상대역이 있는데. 나는 왜 모두를 무시하듯 무대 뒤로 밀어 넣고 허탈해하는 모노드라마를 시작하는 걸까? 분명 떠들고 있는 순간에는 공기가 내 쪽에 가깝다고 느낀다.  그렇다고 꼭 맘에 드는 건 아니다. 오열하기는 싫다. 눅눅하기 싫다. 나는 장르를 바꾸고 싶다. 일상툰과 시트콤 정도면 딱 맞다. 그런 종류의 심호흡을, 박자를, 리듬을 생각한다. 숨을 깊이 들이쉬고 다시 내쉬며 대사를 친다. 사람들 앞으로 간다. 독백하듯 대사를 밀어낸다.


​힘이 잔뜩 들어간 대사는 극의 장르를 바꾸기 위한 기도다. 머릿속에는 <보건교사 안은영>의 한 장면이 스친다. 슬픈 운명을 타고났어도 칙칙하게 살지 말라고, 다치지 말고 도구를 쓰고 유쾌하게 가라고 말을 건넨 강선의 말이 재생된다. 동시에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는 유명한 말도 떠오른다. 내가 맞이한 장면이 비극적일지라도 장르는 희극으로 살아갈 것이다. 내 인생 1열에는 내가 있다. 그가 웃어줬으면 좋겠다. 웃기라도 해줬으면 좋겠다. 비극과 어둠에 꽉 조이지 않고 웃음으로 들썩이는 여백이 만들어지면 산뜻하게 어지러움을 뚫고 나아가고 싶다.

1인극을 하고 있는 나는 핀 조명 아래 배경이 삭제되었다. 스스로 얻었다고 생각하는 겨우 몇 개의 소품으로 극을 진행하고 있다. 아직까지 나는 배경의 영향을 벗어나고 싶은 사람이다. 살아온 배경이 부끄러운 것은 아니다. 다만 거기에서 강화되는 모습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를 새로운 환경과 배경에 데려다주고 싶다. 감각을 익히는 일은 꼭 몸의 훈련이 아니어도 된다. 빈번하게 누적되는 상황과 사건에도 영향을 받는다. 성장 과정에서는 환경을 선택할 여지가 없었다. 이제 내가 익숙해져야 할 노화 과정에는 살뜰히 챙겨줄 거다. 맹모삼천지교.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 세 번의 이사를 한다고 하지만 나는 나를 지극히 사랑하기에 그걸로는 부족하다. 배경 안에 자신을 긍정할 수 있도록 배경과 도구를 고르고 만들 거다. 그래서 나는 어지러운 배경을 모두 무대의 뒤편으로 밀어 넣었나 보다. 이 자리에 다른 배경 말고 나를 보았으면 해서 좀 더 지나면 나에게 맞는 배경을 찾을 수 있으리라.


​현실에서 붕 떠 있는 대사와 목소리에 대해 계속 경계하고 있었다. "이렇게 독백하듯 뱉어내는 말하기가 반복되는 게 맞는 일 일까? 나의 반복은 자연스러운 목소리를 획득하는 과정일까? 어쩌면 독백이 강화되고 있는 건 아닐까? " 이 글에 끝에서 서보니 알겠다. 아니다. 독백은 언제나 순간이니. 독백은 문제가 아닐 것이다. 결국 배경과 상대역들 사이에서 있어야 독백도 가능하다. 배경에 따라 독백은 달라질 것이다. 그래도 독백하는 빈도도 점차 사라졌으면 한다. 너무 자의식 과잉이니까.  자연스러운 문장과 대사를 쓰는 인물로 살아가고 싶다.


환기라는 말은 참 좋다. 햇볕에 쏘이고 바람이 들고 나면 좀 나아진다. 마음이 눅질 때는 마음을 글로 만들어 널어놓는다. 잘 널어놓기만 해도 이렇게 기분이 가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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