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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랑윤 Sep 22. 2017

잔잔했던 커밍아웃 하나, 둘, 셋

안녕하세요. 대한민국에 사는 30대 레즈비언 파랑입니다.


오늘은 제가 커밍아웃했던 얘기를 해 볼까 해요.


몇 년 전이더라..  제가 중학생 때, 동성동본 결혼 합법화에 관해서 얘기가 나올 때였어요.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에 제가 옆 짝꿍한테 말을 걸었죠.


"야! 동성동본 결혼에 당연히 찬성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아니 내가 남자랑 결혼하고 싶을 수도 있고 여자랑 결혼하고 싶을 수도 있는 거 아니야? 나는 여자랑 결혼하고 싶은데? 나는 찬성이야! 찬성!!"라고 말을 했더니


그때 친구 표정이 아직도 기억이 나요. '뭐지 이 멍청이는?' 이런 표정이었죠.

그러면서 저한테 차분히 얘기해 줬어요. "응 나도 네 말에 찬성이야. 근데 여기서 말하는 동성은 그 동성 아니야."라고 하더라고요. 어찌나 쪽팔렸던지.


여하튼 그날 이후로 그 친구에게 많이 의지하고 어린 맘에 집착도 했던 거 같아요.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사는 얘기, 서로의 연애 얘기하면서 잘 지내고 있어요.


그리고 두 번째 커밍아웃은 제 여동생이었어요.


저랑 제 여동생 그리고 애인이랑 애인 언니 이렇게 넷이서 뷰민라를 간 적이 있었어요.

뷰민라는 올림픽 공원에서 하는 인디밴드 뮤직 페스티벌인데 잔디광장에 돗자리 깔고 누워서 맥주랑 도시락이나 부스에서 파는 음식들 먹으면서 노래를 들을 수 있어요.


어쩌다가 애인이 저한테 화가 나 기분이 상해서 음악을 즐기지도 않고.. 돗자리에 누워만 있는 거예요.


저는 옆 돗자리에서 친동생이랑 같이 앉아있었는데 동생을 두고 애인에게 가기가 눈치가 보 안절부절못하다가 결국 돗자리에 제 여동생만 남겨두고 애인에게 가서 오해도 풀고, 기분을 풀어줬어요.


그리고 제 돗자리로 오니까 이제 친동생이 삐져 있는 거예요. 왜 자기는 혼자 돗자리에 앉아서 공연을 봐야 하냐면서 왜 친동생은 챙기지도 않고 남의 동생을 챙기냐며 화가 났더라고요.

그때 여동생한테 하루빨리 커밍아웃을 해야겠구라는 생각을 했어요. 애인과 제가 연인 사이란 걸 알았다면 동생이 그렇게까지 서운해 하진 않았을 텐데라고 생각했던 거 같아요.


그리고서 몇 달 뒤에 제 동생이 일본으로 워킹 홀리데이를 갔어요. 카톡을 주고받다가 연애 얘기가 나왔고, 당장 얼굴 볼 것 아니고 서로 만나기 전에 시간이 있으니까 커밍아웃하기 좋을 타이밍 이라고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카톡으로 얘기를 했죠.


웹툰을 좋아했던 동생 저에게'안녕하세요. 305호, 모두에게 완자가.'등둥 퀴어만화도 자주 추천해주곤 했었어요.

그랬던 동생이니까 크게 걱정 안 하고 커밍아웃을 할 수 있었어요.


제가 카톡으로 "네가 불편해하고 이해 못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너한텐 말해야 할 거 같아서.. 사실 나 그 친구랑 애인 사이야."라고 말하니까

동생의 대답은 예상대로 그리고 다행히도 "약간 의심은 들었는데, 그래도 애인 사이일 줄은 몰랐네! 라면서 잘 사귀어."라고 하더라고요.


그러고 나서 동생이 한국에 돌아왔고 술을 마시면서 더 깊은 얘기를 나눴어요.

"언니가 나한테 커밍아웃해서 우리 자매 사이가 틀어지면 어쩌려고 그랬어. 혹시나 우리 사이가 틀어져도 괜찮다는 결심으로 말한 거야?"라고 동생이 저에게 물어보더라고요.

제가 자매 사이가 틀어져도 괜찮다고 결심을 했다는 게 제 동생은 그게 서운했었나 봐요.


제 생각으로는 당연히 동생은 제가 레즈든 이성애자든 상관 안 할 것이고, 당연히 아무렇지 않아할 거라고 생각해서 커밍아웃했는데 동생 입장에서는 그래도 뭔가 불편하긴 했었나 싶기도 하고 많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근데 불편하면 어쩌겠어요. 지 친언니가 레즈인걸.

만약 동생이 제가 레즈인 게 싫다고 해서, 그렇다고 세상 둘도 없는 자매 사이를 끊을 수는 없잖아요. 내가 레즈인걸 바꿀 수는 없으니까 동생은 레즈인 언니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는 거죠.

그 이후로 동생이 저한테 연애 얘기하면 저도 제 여자 친구 얘기하고 서로 상담도 푸념도 들어주면서 잘 지내고 있어요.


부모님께는 커밍아웃을 하지 않았지만 애인을 친한 동생이라고 소개하고 가끔 집에도 같이 내려가서 자고 오고,  시골에 같이 가서 우리 가족들이랑 함께 김장도하고 그랬었어요.


우리 가족들이랑 스스럼없이 잘 지내주는 애인한테도 너무 고맙고,  제 친구라고 반갑게 맞아주시는 엄마·아빠 동생도 너무 고맙고 지금 생각해보니까 다 고맙네요. 어떻게 보면 매우 불편할 수도 있는 상황이잖아요.


근데 제가 부모님께 '친한 동생이 아니라 애인 사이에요.'라고 말하면 부모님의 반응 달라지겠죠? 아직까진, 지금까진 트러블 없이 제 친구로 애인을 반겨주는 상황이 좋아서 부모님께는 커밍아웃을 미루고 있어요.


전에 애인이랑 둘이 시골에 다녀온 적이 있었는데 애인이 강아지를 보러 갔을 때 할아버지께서 저한테 "저 친구는 몇 살이냐?"라고 물어보시더라고요.

그래서 저보다 세 살 어려요 했더니, "그럼 친구도 아니네. 남자 친구를 데려와야지 여자 친구를 데려오면 어쩌나." 하셨어요.

어? 할아버지 아시나? 싶었지만 그냥 "그러게요." 하고 말았어요. 그랬더니 그 이후로 할아버지도 아무 말씀 없으시고요.


그리고 몇 주 전에는 엄마랑 동생이랑 동생 남자 친구랑 저랑 넷이서 저녁을 먹었어요.

식사가 끝나고 엄마랑 함께 화장실에 갔는데 엄마가 볼일을 보면서 물어보더라고요.

"너는 여자랑 사는 게 좋으냐."

그게 동성애를 뜻하는 거라고는 생각이 안 들고 왜 결혼 안 하냐. 이런 뜻으로 물어본 거 같았어요.


당장 화장실에서 볼일 보는 엄마한테 커밍아웃을 할 수는 없으니까.

엄마 나는 "남자 뒷바라지 못 해."라고 그냥 그렇게 내뱉어 버렸어요. 그랬더니 "니 멋대로 살아라." 하고선 그렇게 대화가 끝났어요.


알고 물어보는 것인지 모르고 물어보는 것인지, 어느 정도 눈치는 챈 것인지 아닌지, 궁금하기는 하지만 사실 그게 막 걱정스럽지는 않아요.


만약 부모님이 눈치를 채셨다면, 그 사실을 자신들이 감당할 수 있을 때 저에게 말을 꺼내실 거라고 생각해요.


저희 부모님 성격으론 대뜸 너 동성애자냐.라고 물어보지 못할 것 같아요. 만약 그런 질문을 받았을 때 제가 그렇다고 대답할걸 부모님은 아실 테니까. 그 후폭풍을 견딜 준비가 됐을 때 말을 꺼내시지 않을까 해요.


부모님께는 당장, 하루빨리 동성파트너가 있고 함께 결혼 생활을 하고 싶다.라는 것을 인정받거나, 이해시켜드려야겠다는 계획은 아직 없어요..


그냥 지금은 나는 남자와 결혼하지 않는 삶을 살 것이고, 이런 삶이 나다운 거고, 이렇게 사는 게 행복하다고 말하고 있어요. 부모님은 이런 것 마저도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고 계세요.


만약 내 행복으로 인해서 엄마·아빠가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그건 나 같은 딸을 둔 부모님이 견뎌야 할 문제지 내가 바뀌거나 그럴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어요.


그럼 부모님은 저보고 "저 이기적이고, 싸가지없는 년."이라고 반응하시지만

진짜로 그건 부모님이 견뎌야 하는 문제잖아요.


동성애, 동성결혼을 떠나서 자식이 어떤 삶을 살겠다고 얘기했을 때, 그리고 만약 그게 일반적이지 않을 때나 부모님 뜻과 다를 때에는 당연히 걱정스럽겠죠.


하지만 부모님은 자식의 삶과 선택을 존중하고 감당해야 하잖아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저희 부모님도 그게 됐을 때. 그런 현실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됐을 때, 그때는 부모님께 오픈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해요.



그다음 세 번째 커밍아웃.


동생 다음으로는 고등학생일 때 친구들 두 명한테 같이 했어요.


그때는 이성애자인 남에게 처음 얘기를 하는 상황이어서 엄청 주저하고, 뜸을 들였던 거 같아요. 걔네가 눈치를 채고 제가 말할 수 있는 분위기 만들고 유도를 해줘서, 그래서 말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그런지 나를 이해해줄까 하는 걱정보다 지금까지 꽁꽁 숨겨왔던걸, 내가 진짜 입 밖으로 꺼내 남들에게 말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더 컸어요.


어쨌든 말을 했고, 말을 하기 전에 울었는지, 말을 하고 나서 울었는지. 울어버렸어요.

그 감정은 슬픈 것도, 서러웠던 것도 아니고 거부당할까 봐 두려워서도 아니고. 정확하게 뭔지 모르겠어요.

와 씨… 나 말했네. 나 말했다. 이런 뭔가.. 해방감?


그 이후로  많은 친구들에게 말한 건 아니었지만. 다른 친구들에게는 조금 쉽게 말할 수 있었고, 말하고 나서 그전처럼 잘 지내는 친구도 있고. 말로는 네가 레즈든 아니든 상관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좀 불편해진 친구들도 있더라고요.


제가 레즈든 어떻든 상관없다곤 했지만 제가 하는 연애사는 듣고 싶어 하지 않고  말 돌리고 그런 친구들 모습 보면 조금 서운하기도 하고 그래서 점점 덜 만나게 되고 그러다 멀어질수밖에 없더라고요.


친구들이 결혼할 때쯤 되니까 인연을 계속 이어가고 싶은 사람과 아닌 사람을 정하기가 쉬웠어요.

내가 오픈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사람과 아닌 사람, 결혼식에 가고 싶은 친구와 아닌 친구.


약간 호모포빅한 친구들하고는 그 만남이 너무 불편하고 대화도 즐겁지가 않아서 "나는 결혼을 하지 않을 건데 너네랑 만나면 항상 그 얘기뿐이라 너무 불편해서 그 자리에 못 나갈 것 같다."라고 하니 그 이후로 다른 연락도 없고, 아예 끊어졌어요.


이렇게 하면서도  '내가 너무 칼같이 구는 건 아닐까. 그래도 학창 시절부터 가끔 만나왔던, 추억이 있는 사이인데 이러다 내 옆에 아무도 남지 않는 거 아닐까.'라는 걱정은 들어요.

그래도 저를 저대로 받아는, 제가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들은 있으니까 그걸로 충분한 거 같아요.


개그우먼 박미선 씨 인스타에서 이런 글을 봤어요.

내 몸에 좋은 습관, 인스턴트 먹지 않기. 물 많이 먹기, 과일 채소 많이 먹기, 꾸준하게 운동하기. 불편한 사람 안 만나기.


불편한 사람들과의 의무적인 관계를 유지하려고 스트레스받는 거보다 내 사람들한테 신경 쓰고 자주 만나는 게 훨씬더 중요한 거 같아요. 나 스스로에게도 그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지금까지 들어주셔서 감사하고요. 누군가는 듣고 계시죠? 너무나 감사합니다.

주말에도 날씨가 좋아서 나들이 많이 다녀오셨으면 좋겠어요. 저도 애인과 함께 근처로 나들이 가려고요. 맛있는 거 많이 드시고 잠도 푹 주무세요. 안녕.





레즈비언 생활 보고서 | 레 생보는 팟캐스트와 인스타도 하고 있어요.

팟빵  http://m.podbbang.com/ch/14488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lesreports
이메일  lesre4t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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