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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랑윤 Sep 26. 2017

나는 되지만 애인은 안 되는 노브라

여름에 브래지어는 정말 더워요

안녕하세요. 대한민국에 사는 30대 레즈비언 파랑입니다.


날씨가 더워질수록 짜증 나는 브래지어. 오늘은 노브라에 대해서 얘기해볼까 해요.


제가 처음 브래지어를 한 건 중2 때였어요.

체육복을 갈아입다가 브래지어 한 친구들을 보고선  '애들은 브래지어 했던데 나도 해야 하나?' 엄마한테 물어봤어요.

그러고 나서부터 엄마가 사다준 와이어 없이 면으로 된 얇은 속옷을 입기 시작했어요.


민소매 없이 교복 블라우스만 입으면 하복을 입을 때는 속옷이 블라우스 밖으로 다 비치잖아요.

민소매를 빼먹고 등교한 날이면 야하게 입지 말라면서 여자 선생님께 등짝을 맞았어요.

 

그렇게 가슴이 나오면 브래지어를 해야 하고, 옷이 얇으면 브래지어를 가리는 민소매를 받쳐 입어야 한다고 배우면서 자랐어요.


고등학생일 때 늦잠을 자버려서 서둘러서 등교를 하다가 브래지어를 안 하고 갔던 적이 있었어요.

학교 와서 알아차렸고 점심시간에 점심도 안 먹고 근처 속옷가게에 가서 속옷을 사다 입었어요.

그제야 안도감이 들더라고요. 속옷을 안 한 것뿐인데 왜 그렇게 불안했을까요.


여고였고, 춘추복 입었을 때라 티도 잘 나지 않았을 텐데 브래지어를 하지 않으니 가슴을 내놓고 다니는 것처럼 허전함, 불안함이 들었어요.


노브라가 편한 것이구나 하는 건 대학생 때 알게 되었어요.

숙취가 심한 날 해장하러 걸어가는 거 조차 너무 힘든 날은 브래지어도 못하겠더라고요.


집 근처 슈퍼나 해장국집이긴 하지만 그렇게 몇 번 안 하고 밖에 나가 보니까 답답하게 가슴을 조이는 것도 없고,  홀가분한 그 느낌이 진짜 편했어요.


그래서 저는 집에 들어오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브래지어를 벗어요.

집에서 노브라에 반팔을 입고 있다가 외출을 할 일이 생긴다면, 반팔을 벗고 브래지어를 하고 다시 반팔을 입고 그위에 남방을 걸치고 외출을 해야 해요. 그런 번거로움, 귀찮음이 따로 없어요.


그럴 것도 없이 노브라로 나간다면 그냥 남방을 걸치고 외출하면 되는데 말이죠.


얇은 티 하나만 입는 여름에는 노브라 외출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남방이나 맨투맨을 입을 수 있는 계절에는 노브라가 진짜 편해요.  제 가슴이 작아서 그런지 누가 노브라를 알아보면 어찌 지란 걱정은 크게 없었어요.


요즘 애인 퇴근시간에 마중 나갈 때 가끔 노브라로 나가고 그랬었거든요.

애인을 만나서 손을 잡고 걷다가 제 가슴에 애인 손을 가져가면 애인이 그때야 깜짝 놀라요.

"안 했어? 왜 그래 진짜. 남들이 보면 어쩌려고." 이러는데 제가 가슴에 손 가져갈 때까지 몰랐으면서!

애인은 노브라 외출은 무조건! 절대! 안 된 다고 그래요.


애인에게는 티가 나든 안 나든 노브라로 밖에 나가는 것은 절대 안 되는 일이고 집안에서도 씻기 전까진 브라를 하고 있어요. 브라를 하고 있는 것이 더 편하대요. 가슴이 크면 브래지어를 하지 않았을 때 쳐지는 느낌이 들고 그런가 봐요.


저는 집에 도착하면 무조건 얼른 브래지어를 벗어버려! 브래지어에서 벗어나라고 종용? 하곤 했었어요.

체격이나 외모에 따라 삶의 경험이 다른 것처럼 여자들은 가슴 크기에 따라서도 차이가 있다는 걸, 같은 여자임에도 브라로 인한 경험이 이렇게 다를 수 있구나 하는걸 애인을 보고 알았어요.


퇴근 후, 저녁 시간에 근처 마트에 갈 때나 술 한잔하러 갈 때에 제가 애인에게 슬쩍 물어보곤해요.

"나 안 하고 가도 되나? 티 안 나지?"


그러면 애인은 제 말이 끝나자마자 표정이 굳어요. "절대 안 되고, 자꾸 그러면 자기도 안 하고 다닐 거라고. 자기가 노브라로 다녀도 괜찮냐"고 물어보는데. 또 그렇게 생각해 보니까 괜찮지가 않더라고요.


만약 티셔츠 위로 젖꼭지의 윤곽이 그대로 드러나 는데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남자들의 시선이 애인 가슴에 멈춘다면? 그들이 애인을 보고 성적인 감정을 느끼고 그런 시선을 표출한다면? 시선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다른 행동이 있다면? 저는 정말 불쾌하고 화가 나고 싫을 거 같아요.


그런 것을 상상했을 때 애인은 절대 노브라로 외출을 안 했으면 좋겠어요. 애인도 저와 같은 이유로 노브라 외출은 절대 안 된다고 하는 거 겠죠?


제가 지금까지 말한 노브라 외출의 전제는 티가 나면 안 되는 거였어요. 브래지어를 안 했다는 사실을 나만 알고 있어야지만 외출이 가능했어요.


다른 사람들은 상관 안 하고 노브라로 외출을 하고 싶지만 브래지어를 안 했을 때 제 가슴에 올 성적인 시선을 생각하면 그럴 수가 없어요. 저는 저를 성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원하지 않아요.

 

나를 한 인간으로 보는 게 아니라 성적 대상화해서 내 몸을 성추행하는 시선.

상대가 느끼는 불쾌함은 전혀 상관 안 하는 자신의 성적 만족을 위한 시선.


그런 시선은 당연히 싫죠. 불쾌하다못해 모욕적으로 느껴져요.


모르는 사람을 빤히 쳐다보면 안 된다는 것쯤은 다 알고 있잖아요. 그 여성이 어떤 옷을 입었든 


'네가 그렇게 입어놓고.'라는 말은 필요 없다고 생각해요.

여성의 신체는 성적인 물건이 아니라 인격을 갖고 있는 한 사람의 것이에요.


시선강간을 고민하다가 연예인 설리가 인스타에 올린 노브라 사진이 떠올랐어요.

설리는 그런 불쾌한 시선은 신경을 쓰지 않는 걸까? 그런 시선을 즐기는 걸까?라는 궁금증이 들었어요.

설리가 올린 사진을 보고 말이 많았잖아요.

어떻게 브라를 안 할 수 있냐. 보기 민망하다. 에서부터 바람직하다는 성적인 반응까지 남 브래지어에 왈가왈부 관심들이 많았었잖아요.


레즈비언들이 나오는 미드 엘워드에서 제니라는 인물이 있어요.

제니는 어렸을 때 성희롱을 당하고 그 상처, 충격으로 정서가 불안한 캐릭터로 나와요.


드라마에서 제니가 스스로 스트립쇼를 해요. 성희롱을 당했는데도 남자들 앞에서 옷을 벗는 게 이해가 안되는 친구가 왜 이런 일을 하느냐고 제니에게 물어봐요. 그때 제니의 대답은 이래요.


"여기선 내가 멈추고 싶을 때 멈출 수 있어, 보여주고 싶은 만큼만 보여주고, 정지하고 싶은 곳에서 정지할 수 있어. 그걸 느끼는 게 좋아."


자신이 수동적으로 소비되는 게 아니라 뭔가 스스로 주도성, 적극성을 가지고 싶다는 말로 들렸어요.


이 쇼의 주최자 위치에서 상대의 반응을 보는 것과, 성적인 시선에 모욕감을 느끼는 피해자위치와는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았어요.


설리를 보면 제니의 그 대사가 떠오르면서 '불쾌한 시선의 피해자가 아니라 나는 내가 입고 싶은 대로 입는 주체자'라는 당당함이 느껴졌어요.


지금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있으면서도 저는 아직까지는, 노브라로 외출을 했을 때 받을 성적인 시선을 무시할 수가 없더라고요.


 브라가 불편해서 안 했을 뿐인데 누군가 내 젖꼭지 자국을 보고 좋아한다 생각하면, 윽 너무 싫어요. 그런걸 무시하는건 큰 용기가 필요한 일 같아요.


이 더운 여름에 어떻게 하면 티가 안 나게 노브라로 다닐 수 있을까 연구 좀 해봐야겠어요.


벌써 여름이라 낮에는 날씨가 푹푹 찌는데 다들 가슴 안녕하시길 바라면서 오늘 방송은 여기까지 할게요.

지금까지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두 밥 잘 챙겨 드시고, 잠도 푹 주무시고, 일은 설렁설렁하세요. 건강이 최곱니다. 안녕!




레즈비언 생활 보고서 | 레생보는 팟캐스트와 인스타도 하고 있어요.

팟빵  http://m.podbbang.com/ch/14488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lesrepo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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