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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랑윤 Sep 29. 2017

퀴퍼후기와 거기서 마주한 나의 편견

왜 나는 여성성을 부끄러워할까

안녕하세요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30대 레즈비언 파랑입니다.


저는 2017년 7월 15일, 서울시청광장에서 열린 퀴어문화축제에 다녀왔어요.

처음 가본 건 아마 청계천에서 홍석천 씨가 사회를 봤던 거로 기억해요.


그리고 두 번째는 2013년도에 홍대에서 했을 때 가봤었고요.

그때는 행진도 하지 않았고, '나는 퀴어로서 이 축제를 즐기겠다.'라는 마음보다 구경 한번 가볼까? 하고 뻘쭘하게 구경하다 중간에 돌아왔던 거 같아요.


그리고 그다음 세 번째는 2015년도에 서울시청에서 했을 때에요.

그날은 시청역 6번 출구를 나가자마자 기독교 사람들이 동성애 반대 피켓을 들이대면서 소리를 질러댔고 한 아주머니는 제 얼굴 앞에 대고 손가락질을 하면서 욕을 퍼부었었어요.


저는 그렇게 발악하는 호모포비아들을 마주한 게 처음이라, 너무 당황스럽고 무서워서 울어버렸어요.

애인이랑 깍지 끼고 있던 손을 놓고 눈물을 닦으니까 그때서야 애인이 알아채고 "울어?"라고 물어보는데 너무 창피하더라고요. 차라리 못 본 척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저희는 그렇게 혐오 단체를 뚫고, 횡단보도를 건넜는데 경찰벽이 광장 벽을 둘러싸고 있어서 입구를 바로 못 찾아 겨우겨우 들어갔던 기억이 나요. 그렇게 광장에 들어갔고 퀴어들 사이에 끼어 있다가 조금 뒤에 사람들과 트럭을 따라 행진했어요.


퀴퍼뽕이라고 하나요? 저는 그날 처음으로 퀴퍼뽕을 맞고 설레고 신나서 정신을 못 차렸던 거 같아요.

많은 퀴어들과 서울 거리를 걸으면서 환호를 하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애인이랑 손을 잡고, 뽀뽀도 하고 그렇게 너무나 당당하게 우리 존재를 소리칠 수 있다는 게 벅차올랐어요.


우리 여기 있다 시발. 나 혼자 아니다!! 우리 이렇게 많아!! 우리 무시하지 마! 이런 맘으로 환호하고 소리 지르고 춤추고 즐기면서 지금까지 조심스러워하고 기죽어 살았었던 한풀이 제대로 한 거 같았어요.


혐오 단체들 때문에 놀라서 울긴 했지만 퍼레이드 하면서는 그런 무서움은 전혀 없었어요.

행복하고 즐거움에 가득 찬 환호 소리가 훨씬 컸기 때문에 그들이 악에 받쳐 내뱉는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어요.


그렇게 처음 맞아본 퀴퍼뽕이 '나도 커밍아웃하고 싶다. 커밍아웃해야겠다.'라는 생각을 갖게 해줬어요. 당당하게 레즈비언으로 거리를 활보했던 그 순간에 느낀 행복감이 잊히지가 않더라고요.


퀴퍼가 끝나고 집에 와서도 SNS에서 다른 사람들이 올린 퀴퍼 사진 찾아보면서 '또 가고 싶다. 또 하면 좋겠다.' 이런 바람을 놓지 못하고 오래 여운을 간직했었어요. 그래서 그 퀴퍼뽕 맞으려고 매년 퀴퍼를 찾아가게 되는 거 같아요.


올해는 전보다 조금 서둘러서 시청역에 12시 반쯤 도착했어요.

부스들을 돌면서 미리 생각해뒀던 굿즈도 사고 싶은 생각에 조금 일찍 가야겠다고 서둘렀는데, 광장에 들어가니 이미 많은 분으로 북적이더라고요.


광장 안과 광장 밖은 진짜 다른 세상 같았어요. 광장에서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보면서'아! 퀴어들 세상이 이런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쁜 색으로 머리를 탈색하신 분들도 많았고 개성 있게 남들 시선 신경 안 쓰고 마음대로 꾸미신 분들도 많았어요.


그런 분들은 표정이나 행동이 정말 자신감 넘치고 멋졌어요. 스스로가 뭘 원하는지 알고 그걸 또 어떻게 표현하는지도 아는 것 같았어요.


회사 나 학교, 아니면 가족 이런 사회에서는 탈색, 노출, 여자의 짧은 머리, 등등 조금이라도 평범에서 벗어나면 손가락질하고 잔소리하잖아요. 하지만 그날의 서울 시청광장은 달랐어요.


여자가 브래지어를 안 해도, 노출을 해도, 삭발을 해도, 겨드랑이 털을 보여도, 그리고 남자가 화장해도, 치마를 입어도, 크롭티를 입어도 환영받는 날이었어요.


광장 밖이나 퍼레이드 밖에 있는 사람들은 그런 모습을 보고 손가락질할 수도 있겠지만, 혐오자들은 우리가 뭘 해도 그렇게 비난할 사람들 이니까 그날만큼은, 퀴어문화축제날 만큼은 칭찬받고 싶은 어린애처럼 사람들 눈치 볼 필욘 없는 거 같았어요.


광장 밖에서 퀴어들 그러다 지옥 간다고 백날 소리 질러봐야 소용이 없다는 걸 광장에 가보시면 느끼실 거예요.

일 년에 서울에서 한번, 대구에서 한번 열리는 퀴퍼(올해 2017년도엔 부산에서도 열렸어요)지만 그날 그 공간이 바로 천국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너무 오버했나요?(ㅋㅋㅋ)


"너 이상해."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없어요. 다들 신나서 누구 미워할 틈도 없이 환호하고 춤추고 즐기면서 모두들 행복해 보였어요.


뭔가 퀴퍼는 성소수자들의 프라이드 행진 그 이상의 의미인 거 같아요.

축제의 이름은 퀴어문화 축제이지만, 그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고정관념? 편견? 규범을 벗어나는 날로 삼아도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평상시에는 쉽게 용기를 내기 어렵지만 퀴퍼날 만큼은 내 안에 부끄러움이나 두려움만 이겨내면 자기의 개성을 마음껏 표출할 수 있는 날이잖아요.


예를 들어 만약 투 블록 머리가 너무 하고 싶은데 용기가 안 난다 싶으면 퀴퍼 전날 자르고 퀴퍼 가면 돼요. 거기는 짧은 머리를 한 사람들 정말 정말 많아요. 노브라로 서울 거리를 행진하는 기분은 어떨까요?

평상시에는 너무 튈까 싶어서 못 입었던 옷을 입는 것도 신날것 같고 살 빼면 입어야지 하고 봐 뒀던 옷을 입고 나오면 살 빼지 않아도 입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길 것 같고, 치마를 한 번도 안 입어본 사람이 치마를 입었을 때는 기분이 어떨까요. 또 뭐가 있을까요?


퀴퍼가 미디어에 접했던 분들의 부스 가서 직접 보고, 귀여운 굿즈 사고, 다 같이 함께 환호하는 퍼레이드도 너무 즐겁고 신나지만 평상시에 겁나서 못하는 거 (당연히 범죄는 빼고요) 퀴퍼때 해볼까 라는 나만의 이벤트를 만들고 즐기면 퀴퍼뽕도 더 오래가고 뭔가 애인이나 친구들과의 추억이 하나 더 쌓이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왠지 퀴퍼니까 퍼레이드 끝나고 저녁때는 번개나 클럽 가서 마시고 놀고 싶고 막 설레잖아요 근데 끝나면 집에 가야 해서 그렇게 놀아본 적이 없었어요. 그게 너무 아쉬워요. 이번에도 앤이랑 저는 을지로 입구 사거리까지 걷다가 진짜 너무 배고파서 중간에 나와서 감자탕에 소주 마시고 기차 타고 집에 왔어요.

다음번엔 꼭 뒤풀이를 갈 수 있길..


이번에는 퀴퍼를 다녀와서 제가 개인적으로 깨닫게 된 것, 반성해야 할 것을 얘기해 보려고요.

지금까지는 편견 인지도 모르고 살았던 제 안의 편견을 확인하고 놀랐던 거 같아요.


그날 광장 안에는 진짜 개성 넘치는 분들이 많았아요. 여자/남자 성별을 구별하기 어려운 분들도 계셨어요. 그런데 문제가 뭐냐면, 제가 그분들을 보면서 '어? 여자야? 남자야?' 자꾸 어느 한쪽으로 구분해 놓으려고 하는 거예요.


목젖이 나왔나, 성기가 튀어나왔나, 가슴이 있나 힐긋힐긋 관찰해가면서 지정 성별?을 찾아내서 저 사람을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하려고 무의식 중에 엄청 노력하더라고요.


그 사람 자체를 보는 게 아니라 자꾸 여자야 남자야 이 물음만 머릿속에 가득했어요.

그리고 제가 알아낸 그 사람의 성별이 만약 남자라면 '아…. 남자였어?' 이런 기분이고 여자라면 '아! 여자였구나?!' 이런 약간 더 반가움이 생기더라고요.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그 사람이 나랑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나랑 말 한마디 나눌 사람도 아닌데 왜 나는 그 사람의 다른 개성보다 성별이 특히 중요하고 꼭 여자/ 남자로 구분을 해야 맘이 편할까요?


남자라면 좀 더 경계심을 가져야 하고 여자라면 그 경계심을 풀어도 되니까 그래서 그런 걸까요?

퀴퍼에 와서까지 지정 성별로 사람을 구분하려고 안달 난 제 자신을 보고 내가 가진 편견도 엄청나게 심하구나 라는걸 깨닫게 된 거 같아요.


그리고 퀴퍼에서 드랙퀸분들을 볼 수 있었어요. 그때마다 느끼는 건데 그분들의 손동작이나 행동에서 나오는 선이 너무 곱고, 우아하고, 섹시하고 그들이 표현하려고 하는 여성성이 정말 멋있어 보이더라고요.


그러면서 제가 든 생각이 왜 나는 여성성을 부끄러워할까??라는 거였어요. 제가 다른 사람 앞에서  진한 화장, 치마, 몸매를 부각하는 옷, 섹시한 포즈나 동작 등등으로 저의 여성성을 강조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저는 그 상황이 정말 불편하고 부끄러울 것 같거든요.


나는 여성인데 사회에서 여성성이라고 하는 것들에 왜 거부감이 생긴 걸까? 불편해서? 나한테 안 어울려서? 내 취향이 아니라서? 왜 그럴까요?


'나 치마 안 어울려.' 이 정도가 아니라  "내가 무슨 치마를 입어. 싫어!" 이런 식으로 격한 거부 반응이 나와요.


생각해 보면 저는 젠더 고정관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고, 그걸로 다른 사람들을 잘도 판단하고 있더라고요. 그런데 또 누가 나를 그 고정관념으로 옭아매고 판단하면 진저리 치면서 도망가고 싶었던 거 같아요.


저는 이분법이 싫다면서 여자와 남자, 반반씩 나눈 그 중간의 가림막을 없애는 게 아니라 여자의 반대편에 가서 여성성을 거부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으 어렵다.. 너무 어려워요.. 지금 당장 답을 내리거나 해결할 수 있는 고민거리는 아닌듯해요.


마지막으로 민주노총 부스에서 받은 팸플릿에 평등과 존중을 위한 약속 이란 글이 있었는데 이거 읽어드리고 마무리할게요.


평등과 존중을 위한 약속


하나. 시혜와 동정은 NO!

동등한 사회 구성원으로 연대하는 마음으로 축체 참여자들을 만나요.


둘. 타인의 성별 정체성, 성별 표현, 성적 지향을 판단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존중해요. 성소수자를 혐오 부정하는 말과 행동은 하지 말아요.


셋. 성별, 국가, 인종, 나이, 질병, 장애 여부, 가치관 등을 이유로 차별하거나 함부로 말하는 것은 삼가 주세요.


넷. 불쾌감과 성적 수치심을 느끼게 만드는 신체접촉, 외모 평가는 하지 말아요.


다섯. 퀴어문화축제는 모두를 위한 즐거운 축제이자 연대의 장입니다.

평등과 다양성이 펼쳐지는 광장을 함께 만들어가요.!


그럼 지금까지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더운 여름인데 더위 조심하시고, 냉방병도 조심하시고, 장염도 조심하시고요.

안녕



레즈비언 생활 보고서 | 레생보는 팟캐스트와 인스타도 하고 있어요.

팟빵  http://m.podbbang.com/ch/14488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lesreports
이메일  lesre4t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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