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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준성 Apr 24. 2018

인연은 태풍을 타고|태풍

홋카이도 한 달 살기

‘카톡, 카톡’


아침부터 카톡이 난리다. 아이들 하나씩 껴안고 다디단 꿈을 꾸며 자고 있었는데 짜증이 확 밀려왔다. 아내와 내 스마트폰이 동시에 울리기도 하고 따로 소리내기도 하는 것을 봐서 여러 채팅방인 것 같다.


“아침 일찍부터 뭐지? 안 그래도 바람이 많이 불어 잠도 설쳤구먼.”

엊저녁부터 날이 좋지 않았다. 매일같이 우리에게 생기를 전해 주던 요테이산이 땅거미와 함께 온통 구름에 둘러 쌓여있었다. 


“뭐지? 양가 부모님인데? 태풍? 태풍 어떠냐고 하는데?”

“엥? 그럼 밤새 바람 소리가 요란하더니 그게 태풍 오는 소리였나?”

그러고 보니 창문을 통해 기이한 소리를 내며 밀려들어 오는 바람도 여간 스산한 것이 아니었다.


일본은 태풍에 민감한 나라다. 멀리서 태풍이 생성만 되었다 하면 연일 뉴스에 도배가 된다. 그래도 홋카이도는 일본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있어 태풍의 영향이 거의 없다고 했다. 그런 줄 알았다. 아니 사실 태풍은 신경도 안 썼다는 말이 맞겠다. 한국에 있는 가족들이 아침 뉴스를 보고 걱정이 되어서 먼저 연락을 한 거다. 일본어를 몰라 그동안 텔레비전을 틀지 않았더니 태풍이 오는 것도 전혀 몰랐다.



텔레비전 속 일본 북부는 난리가 났다. 9호 태풍 ‘민들레’가 생성과 동시에 일본으로 직행하더니 열도를 따라 홋카이도를 향해 북진하고 있었다. 일본 북부는 이미 비행기, 철도 심지어 버스까지 모두 ‘운행중단’이라는 한자가 떡하니 보였다. 


“어, 운행중단? 그럼 서온이네는 어떻게 오지?”

우리 가족과 여행을 자주 다니던 서온(윤정이 보다 한 살 위 언니)이네 가족이 오기로 한 날이었다. 우리가 홋카이도에 한 달 살기를 한다고 했을 때 기꺼이 여름휴가를 함께 보내고 추억을 만들어 보자며 중간에 합류하기로 했다. 


다행히 카톡에는 비행기를 탔다는 메시지가 남겨져 있었다.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인데 아직 답장을 읽지 않은 것이 와이파이를 못 찾은 모양이다. 


“여보세요? 우리 도착했어요. 삿포로까지는 어찌어찌 왔는데, 잠시 삿포로에서 구경하고 노는 사이에 니세코로 가는 JR이 운행중단되어 버렸어요.”

서온이 엄마 지현 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지현 씨는 아내의 동창이다.


“어쩌죠? 태풍이 점점 심해지는 상황이니 빨리 근처 호텔이라도 알아보세요. 아직 태풍이 홋카이도로 오지도 않았는데 운행중단한 것을 보면 내일 오전 태풍이 지나갈 때까지는 계속 운행을 안 할 것 같아요.”


국내 기상청에 들어가 봤다. 오늘 오후부터 내일까지 홋카이도에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우리야 집에 머물면 되지만 서온이네는 얼마나 당황하고 있을까. 잠시라도 연락을 놓칠까 봐 계속 스마트폰을 들고 있었다.


다행히 삿포로 역 근처 호텔을 잡았다는 카톡이 왔다. 같이 보낼 하루가 줄어드는 것은 아쉽지만 비행기라도 떴으니 그나마 다행이겠지. 삿포로에서 시간을 보내지 않고 바로 왔다면 지금쯤 같이 있을 텐데.


누가 홋카이도는 태풍이 오지 않는다 했는가. 불안해서 틀어 놓은 텔레비전에서는 태풍의 일거수일투족을 초 단위로 알려주었다. 이건 뭐 정보를 주자는 건지 불안을 조장하는 건지 분간이 안 되어 껐다가도 혹시나 해서 다시 켜기를 반복했다. 내일이면 렌터카를 받아 본격적으로 여행을 다녀보자 했더니 태풍이 방해한다. 뭐 별수 있나.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일이면 일찍 포기하고 다른 대안을 찾는 수밖에. 여행한답시고 놀아 주지 못한 아이들과 밀린 숙제 하듯 온종일 뒹굴뒹굴했다. 



다음 날. 생전 처음 일본에서 맞이해 본 태풍은 걱정했던 것보다는 조용히 지나갔다. 타국이라는 부담감, 우리 가족 말고는 의지할 곳이 없다는 외로움, 별일 없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감 3종 세트가 수시로 불침번을 자처하고 머릿속에서 임무 교대를 하는 바람에 잠을 좀 설친 것 말고는 나쁘지 않았다. 니세코라는 지역이 높은 산에 둘러싸인 분지 형태라 더 영향이 적었을 것 같다.


고맙게도 숙소 관리 업체에서 직원이 다녀갔다. 더듬거리는 영어로 태풍에 피해가 없었는지 물어보는데 왈칵 감동이 밀려왔다. 하루 동안이었지만 온갖 걱정을 혼자 떠안고 의지할 곳이 없었는데, 그래도 누군가 우리에게 관심을 두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물론 업무 매뉴얼에 따른 자발적이 아닌 의무적인 방문이었다 하더라도 순간의 고마움은 그런 상황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이해가 될 것이다.  


아침부터 틀어 놓은 텔레비전에서는 9호 태풍이 큰 피해 없이 홋카이도를 빗겨 나갔고 열차도 정상 운행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그와 동시에 서온이네 가족도 굿찬 역에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전해 왔다.


“우리 왔어요. 미안 미안. 어제 왔어야 했는데.”

고생은 자기들이 했으면서 얼굴에 미안함이 가득하다.  


“삿포로 구경하다가 태풍에 발이 묶일 줄이야 누가 알았겠어. 비도 오지 않은 상황이었고 바람만 조금 강한 정도였거든. 그 정도로 기차 운행을 중단하는 게 정말 이해가 안 가는 거야. 그런데 말이야, 정복을 입은 역장 같은 사람이 확성기에 입을 대고 ‘운행중단합니다’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아무도, 정말 아무도 말 한마디 없이 줄을 서서 표를 환불받는 거야. 우리나라 같으면 막 소리치고 따지고 뭐 그런 사람도 꼭 있었을 텐데 그치? 그리고 말이야……”


오랜만에, 그것도 외국에서의 조우가 양념처럼 더해지고 태풍을 뚫고 달려온 무용담이 조미료가 되니 두 엄마는 각자의 이야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다. 윤정이와 서온이도 쉴 새 없이 떠들어 대며 지난 이야기를 꺼내 놓는다. 둘째 수정이만 갑자기 엄마와 언니를 빼앗기고는 아빠한테 치댄다. 


생기가 도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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