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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준성 Jun 05. 2018

병 우유 한 모금, 추억 한 줌|무로란 #1

홋카이도 한 달 살기

니세코는 홋카이도 남부에 속해 있다. 한국 사람들에게 인기가 높은 비에이나 후라노와는 차로 4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다. 과감히 북부는 포기하고 남부 위주로 다녔다. 주요 관광지 외에는 이름이 낯설기 마련인데 지난 태풍을 겪으며 ‘무로란(Muroran, 室蘭)’이라는 지명을 자주 접했다. 녹색창의 힘을 빌려 홋카이도에서 가장 큰 산업도시이며 삿포로에 이어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니세코에서 무로란까지는 대략 2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다. 무로란에 대한 정보가 없어서 무작정 비지터 센터만 내비게이션으로 찍고 출발했다.



무로란 비지터 센터에서 여행지도와 전단을 몇 개 챙기면서 안내원에게 슬쩍 근처 맛집을 물어보았다.

“근처에 일본 천왕도 다녀간 텐동집이 있어요. 차 있으시죠? 주차도 가능해요. 핸드폰 줘보세요.”


친절히 구글맵에 표시까지 해주는 덕에 검색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지 않고 쉽게 점심을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알려준 곳은 ‘덴카츠(天勝)’라는 텐동 전문점이었다. ‘텐동’은 튀김을 뜻하는 ‘텐부라’를 올려 먹는 덮밥의 약칭으로 줄여서 부르는 말이다.



차를 대고 입구로 들어섰다. 백발의 온화한 할머니가 인사와 함께 그림 메뉴를 건네주었다.

“스페셜 텐동 있어요?”


끄덕끄덕. 있다는 제스처와 함께 계산기에 1350을 찍어주신다. 여기는 텐동 전문점인데 특히 가리비와 왕새우가 올라가는 ‘스페셜 텐동’이 인기다. 준비한 재료가 떨어지면 오후부터는 먹을 수조차 없단다. 스페셜 텐동과 기본 텐동, 그리고 소바를 시켰다. 선불로 음식값을 지불하면 플라스틱 티켓을 준다. 이걸 주방 직원에게 건네면 된다.



기다리던 스페셜 텐동이 나왔다. 달달 짭조름한 소스가 뿌려진 밥에 튀김을 조금 잘라 입에 넣었다.

“오빠. 너무 맛있다. 와~. 가리비가 그냥 입에서 녹아버려.”

“음.. 음.. 와~. 여기 텐동에 들어간 오징어 튀김도 진짜 맛있어.”  


태어나서 지금까지 먹은 그 어떤 덮밥과도 비교가 안 되었다. 튀김옷이 익을 만큼 튀기다 보면 가리비 살이 질겨질 것 같은데 맛은 정 반대였다. 새우를 좋아하는 둘째도 “시우~ 시우(새우)” 라 말하며 입에 넣기가 무섭게 또 달란다. 이름에 걸맞게 양도 스페셜 해서 어느 정도 먹다 보면 느끼해질 것 같지만, 같이 내어주는 진한 녹차 한잔에 다시 젓가락질이 시작된다.



“배도 부르고, 슬슬 움직여 볼까? 아까 받은 관광지도 좀 줘봐.”

“무로란 8경? 크크 여기도 우리나라처럼 지역명에 몇 경, 몇 경 이렇게 부르나 봐.”

“그렇네. 여행지도 모두 무로란 8경 설명뿐이네. 하긴 공업 도시라 다른 곳보다는 관광자원이 부족하겠지.”


고민 없이 무로란 8경을 따라 가보기로 했다. 먼저 도착한 곳은 무로란 8경 중 하나인 ‘금병풍(金屛風)’. 바다와 마주한 절벽이 아침 떠오르는 햇볕을 만나면 마치 금빛 병풍처럼 보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날씨가 흐려 ‘금’병풍 보다는 ‘동’병풍이 더 어울릴 것 같은 색깔이었다.



“아빠. 이렇게 팔을 벌리면 날아갈 것 같아.”

“오빠. 어쩌지? 바람이 너무 분다. 풍경이고 뭐고 애들 감기 걸릴 것 같아.”

“그러네. 오늘은 바다 쪽 풍경 보기는 글렀다. 일단 철수하고 다른 곳을 찾아보자.”


근처 수족관이 있다고 해서 내비게이션을 찍고 이동을 시작했지만, 아침 낮잠을 거른 둘째가 타자마자 잠이 드는 바람에 일단 집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냥 집까지 바로 가기는 아쉽고, 그렇다고 차에서 무작정 기다리기도 애매했다.


“오빠. 아까 오는 길에 보니깐 ‘관광물산관’이라고 한자로 써진 곳이 있었어. 잠시 검색해 보니깐 지역 농산물과 공원이 있고 체험 같은 것도 한다는데?”

“체험? 엄마 체험이라고 했어? 아빠 아빠 아빠 체험이 있데~~ 거기 가자.”

“알았어. 진정 좀 해봐. 내비게이션으로 1시간 정도네. 그 정도면 수정이 깨도 되니깐 가는 길에 들려보자.”



지역 농산물이 있다고 하더니 ‘니세코 뷰 플라자’처럼 근처 지역 농장에서 생산된 다양한 농산물이 전시되어 있었다. 규모는 중견 크기의 마트 수준으로 각종 농산물과 가공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코너마다 주인이 다르고 기준이 달라 가격과 품질도 천차만별이다. 당근 하나만 봐도 어디는 씻어서 팔고 어디는 흙 당근 그대로 판다. 당근 가격이 100엔으로 같은 두 곳을 두고 한참을 고민했다. 하나는 굵은데 3개, 하나는 가늘고 4개. 별 차이도 없지만 이상한 데서 찾아오는 결정 장애.



양파와 당근을 담고 지역 농장에서 생산되는 우유와 밀크 푸딩을 같이 샀다. 북해도 우유 하면 최고 맛과 품질을 자랑한다. 특히 병에 포장된 우유는 옛날 어렸을 때 먹었던 맛이 생각나게 한다. 가끔 오래된 노래를 들으면 그때의 기억이 자동으로 소환되는 것처럼. 노래뿐만 아니라 맛도 추억을 불러내는 강력한 힘이 있었다.


지금의 종이 우유팩이 있기 전에 아침마다 배달되던 병 우유. 투명한 병 우유에 빨간색 동그라미가 인상적이었던 그 우유를 아침마다 가지러 나가는 게 큰 기쁨이었다. 겨울 아침 잠옷 바람에도 입김 호호 불며 달려 나가게 했던 그 맛. 참 고소하고 진했던 그 맛을 북해도 병 우유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또.또.또! 입대고 먹지 말라니깐!!]


엄마한테 걸려 잔소리 들을 것을 알면서도 병 우유는 입을 대고 먹어야 맛났다. 종이 뚜껑을 따고 하얀 수염을 만들며 마시던 그 맛. 그런 기억이 없는 아이는 아마도 홋카이도의 우유 맛으로 기억하겠지.


다테시(Date, 伊達市)는 홋카이도에서 유일한 ‘아이(쪽)’ 생산지로 쪽 염색이 유명하다고 얼핏 들었었는데 우연히 물산관 옆 공방에서 체험할 수 있다고 해서 자리를 옮겼다.



체험을 담당하시는 분에게 가격과 체험 방법 등을 물어봤는데 영어를 전혀 못 하셨다. 일본을 그동안 여행하면서 영어를 서툴게 하시는 분들은 많이 만나 봤지만 관광지에 계신 분이 전혀 못 하신다니. 체험을 위해서는 방문록(?) 같은 곳에 주소를 적으라고 하는 것 같은데, 이게 도자기 체험처럼 체험 후 나중에 물건을 택배로 받는 것처럼 이해가 되었다. 여행자에게 나중에 받는 것은 의미가 없기에 바로 받을 수 있는 거냐고 아무리 손짓 발짓을 해도 통 못 알아들으신다.


안 되겠다고 생각하였는지 갑자기 비닐봉지를 가져오시더니 넣고 가져가라는 시늉을 한다. 그제야 체험을 하고 나서 바로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손수건 체험을 주문했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역시 사람에게는 바디랭귀지 있지 않나. 말이 안 통하니 계속 웃으시면서 몸으로 알려주신다. 계속 웃는 것만으로 좀 미안했던지 일본말로도 계속 뭐라고 설명하시는데 뭐 알아듣지는 못했다. 직접 하나하나 같이 해주셔서 윤정이도 어렵지 않게 체험을 했다.


거의 끝나갈 무렵, 갑자기 생각나신 듯 어디론가 가시더니 떡하니 한국어 버전의 쪽 염색 설명서를 주시는 것이 아닌가. 진즉에 보여주셨으면 좋았을 것을. 천연 염색치고는 냄새가 무지 고약하였는데, 설명서에는 아이꽃을 바로 사용하지 않고 발효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아이 염색(쪽 염색)은 천연 방충제의 효과가 있어서 벌레나 모기를 막아준다고 한다. 딴 나라말 듣느라 답답한 마음이 뻥 뚫리는 느낌.



체험이 끝나고 손수건을 펴 보았다. 파란 바탕에 하얀 꽃이 금방 피어났다. 알아들을 수 없어 그런지 ‘뚱’ 해있던 아이가 그제야 환하게 웃는다.  




Travel Tip. 텐카츠(天勝)

가격 : 텐동 850엔, 스페셜 텐동 1,350엔, 소바 700엔

(스페셜은 당일 재료가 떨어지면 판매 중단)

영업시간 : 오전 11시부터 오후 6시까지(매주 목요일 휴무)

전화번호 : 0143-22-5564


Travel Tip. 다테시 관광물산관

쪽염색 체험비 : 꼬마수건 500엔, 손수건 550엔 등

전화번호 : 0142-25-5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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