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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용 Sep 15. 2017

시계 소리를 들으며 느끼는 것들

기계의 속삭임이랄까요

페이지 가운데 보이는 게 미니트 리피터 무브먼트입니다. Thewatchmanpro / wikimedia commons



현재 시간을 소리로 알려주는 기계식 시계를 미니트 리피터라고 한다. 케이스에 붙어 있는 스위치를 당겼다 놓으면 미니트 리피터의 구동만을 위해 장착된 별도의 태엽이 풀려나가며 시간과 분에 맞춰 작은 종을 친다. 종이라 해도 개념적으로 종일 뿐 소리가 별로 크지도 않다. 시청역 플랫폼 4-3에서 손목시계의 미니트 리피터를 울린다면 아무도 못 듣는다. 미니트 리피터의 종소리는 "내선 순환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라는 멘트의 소리보다 훨씬 작다. 사실은 스마트폰에서 나는 "까똑" 소리보다도 작다.


그럼에도, 아니면 그렇기 때문에 미니트 리피터의 소리를 듣는 일은 자본주의 문명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취미에 속한다. 이 소리를 들으려면 기본적으로 미니트 리피터 시계값이 필요하다. 지금 모 백화점 명품관에서 파는 모 명품 시계 브랜드의 미니트 리피터 가격은 2억 8천만원이다. 돈은 와인 시음 행사의 참가비 개념에 불과하다. 당신이 미니트 리피터의 소리를 온전히 들으려면 화요일의 예배당처럼 조용한 개인 공간을 가져야 한다. 제철 호박의 지름보다 작은 케이스 안에 들어 있는 기계식 시간 알람 시스템이 얼마나 대단하고 복잡한 기술인지도 이해해야 한다. 이 모두를, 즉 돈과 공간과 교양(이라고 부르는 취미생활용 배경 지식)을 모두 가져야 미니트 리피터라는 초소형 사치를 즐길 수 있다. 


기계식 시계는 전통을 강조하는 이미지메이킹과는 달리 거의 모든 부분에서 공정 효율화를 완성시켰다. 현대의 고급 기계식 시계는 <사운드 오브 뮤직>풍 방갈로에서 노구의 장인이 만드는 게 아니라 반도체공장 이상의 집진시설을 갖춘 공장 안에서 문신을 한 젊은 숙련공이 만든다. 복잡시계 제작의 아주 많은 부분이 기계 생산으로 넘어갔다. 그 중에서도 마지막으로 남은 인간의 영역이 미니트 리피터다. 아직까지는 기계가 소리의 질감을 조절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당신이 '미니트 리피터를 못 사면 기계식 시계의 소리를 못 즐기나' 라고 시무룩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뇌에서 뇌파가 나오듯 기계식 시계에서는 소리가 나온다. 모든 기계식 시계의 무브먼트에는 탈진기라는 장치가 들어 있다. 시계의 동력원인 태엽을 시간에 맞추어 천천히 풀려나가게 하는 부품이다. 태엽이 풀려나가는 속도가 조절되는 과정에서 부품들이 부딪히며 미세한 진동과 소리가 난다. '째깍째깍'이라고 표현하는 그 소리다. 10만원 아래로 살 수 있는 동남아시아산 세이코에서도 기계식 시계만의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손목시계를 귀에 바짝 대면 두 개의 박자만으로 이루어진 작은 소리가 들린다. 


당신이 몹시 예민을 떨면 그 소리를 들으며 문명이란 것을 상상할 수 있다. 기계식 시계의 진동음은 갈릴레이로부터 왔다. 갈릴레이가 진자의 등시성을 찾아냈고 호이겐스가 진자 시계를 만들었다. 그 기술이 점차 작아지고 정확해져서 손목 위에 올라온 것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기계식 시계다. 인류는 기계식 시계 덕분에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있었고, 정확한 시간을 안 덕분에 바다 위에서 현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서양 문명은 바다를 헤쳐나가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다. 그동안 시간을 알려주는 기계는 더욱 작아지고 정밀해져서 많은 사람의 손목 위에 얹힐 수 있었다. 시계가 많은 사람의 손목에 얹힌 덕분에 사람들은 막연한 시간 관념의 시대를 벗어나 단체로 '몇 시 몇 분'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손목시계가 만들어낸 집단적 시간 공유 때문에, 손목시계라는 소형 정밀 시간 계측기 덕분에 인간은 두 번의 세계대전을 치를 수 있었다. 당신이 귀를 기울여 듣고 있을 손목시계의 태엽 소리를 동부전선의 어떤 병사도 숨죽여 듣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목숨과 세계의 운명을 걱정하면서. 


세계는 용케 21세기로 접어들었다. 통신위성의 시대, 대도시 어디서든 최고의 기계식 시계보다 훨씬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있는 시대다. 지금의 기계식 시계는 소형 정밀 계측기라는 무거운 책임감에서 벗어나 멋부리는 남자의 여흥이 되었다. 사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다 잊어도 상관없다. 기계식 시계의 무브먼트에 귀를 가만히 대면 아주 미세한 두 박자 소리가 들려온다. 누군가가 성실하게 조립해둔 세계가 문제 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다. 그 사실을 깨닫기만 해도 가끔 안심이 된다. 기계식 시계가 지금의 남자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여흥과 위로가 그 작은 소리일지도 모른다.



오디너리 매거진에 수록된 글입니다. 오디너리 매거진은 창간한 지 얼마 안 된 잡지입니다. 이렇게 훌륭한 잡지에 원고가 실리다니 얼떨떨했습니다. 시간 나실 때 한번쯤 읽어 보세요.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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