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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용 Oct 24. 2017

옷 이야기_01

킹스맨: 최첨단 패션 필름




2017년 5월, <킹스맨: 골든 서클> 개봉 4개월 전

2017년 5월 25일 서울 임피리얼 팰리스 호텔 코너 스위트룸의 문은 닫혀 있었다. 초대장을 받은 사람이 두드려야만 문이 열렸다. 열린 문으로 들어간 방 안에는 산업 기밀이나 고문서 같은 게 아니라 옷이 있었다. 영화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이하 <킹스맨 1>) 속편인 <킹스맨: 더 골든 서클>(이하 <킹스맨 2>) 컬렉션의 발표가 있는 날이었다. 영국 온라인 쇼핑몰 미스터포터가 주관한 행사였다. 미스터포터의 아시아태평양 지사인 홍콩 사무실에서 이 행사를 준비했다. 한국의 패션 및 라이프스타일 잡지 에디터만 이 행사에 초대를 받았다. 


왜 미스터포터는 한국에서 <킹스맨>의 옷을 소개했을까? 데이터가 나왔기 때문이다. 데이터로 봤을 때 킹스맨은 한국을 외면할 수 없다. 한국은 <킹스맨 1>의 최상위권 흥행국이다. 박스오피스모조닷컴에 따르면 <킹스맨 1>은 8100만 달러를 투자해 만들어 4억1435만1546달러를 넘는 매출을 올렸다. 그중 미국 시장 매출은 전체의 31% 정도다. 매출의 70%에 가까운 2억8608만9822달러가 타 국가에서 발생했다. 그중 최고 매출 국가는 중국. 7466만7000달러 매출이 나왔다. 한국이 2위다. 한국은 4688만5460달러 매출을 기록했다. 매튜 본도 자신의 영화가 동아시아에서 이렇게 인기를 끌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고 했다. 


데이터가 나온 분야는 박스오피스만이 아니다. 의류 판매 데이터로 봐도 한국은 소중했다. 한국은 미스터포터의 킹스맨 라인이 가장 많이 팔린 나라 중 하나이기도 했다. 한국에 사무실도 없는 미스터포터가 굳이 한국에서 신제품 발표회를 연 데에는 이런 사정이 있었다. 그나저나 영화에 웬 의류 판매 데이터?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 <킹스맨 1>의 대사 중 가장 많이 회자된 말이다. 오늘의 이야기는 이 구절에서부터 출발한다.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는 건 하나의 주장일 뿐이다. 다만 사람은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고 말하는 영웅이 나오는 이야기를 만든다. 21세기에는 그 이야기에 옷이 실려 관객에게 흘러간다. 메시지가 실린 이야기가 사람을 행동하게 하는 건 인류 역사상 계속 일어났던 일이다. 21세기에는 그 이야기의 힘이 신기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비밀 에이전트의 스타일 레슨

<킹스맨 1>의 줄거리는 신사 해리 하트(콜린 퍼스)가 노동 계급 비행 청소년인 에그시 언윈(태런 애저턴)에게 전해주는 스타일 레슨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명대사는 <에스콰이어> 같은 잡지에서 말하는 스타일 레슨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비슷하다. "옥스퍼드, 브로그 말고", "정장은 현대 신사의 갑옷이다" 같은 말은 남성 잡지 독자라면 잡지에서 몇 번씩은 봤을 말이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아무리 설정이 새빌 로의 양복점 출신 비밀 스파이라고 해도 너무 광고 문구 같은 말 아닐까? 


<킹스맨>에 나온 거의 모든 옷은 구입할 수 있었다. 영화가 흥행해서 다급히 만든 옷이 아니다. 해리 하트가 입었던 날씬한 더블브레스트 정장, 대사에 나온 검은 옥스퍼드 슈즈, 멀린(마크 스트롱)이 썼던 안경, 킹스맨의 요원 훈련 과정에서 에그시가 입었던 울 점프슈트까지 다 살 수 있었다. 디즈니랜드에 가면 <캐리비안의 해적> 캐릭터 상품 같은 걸 살 수 있다. <킹스맨>의 등장인물이 입고 나왔던 옷도 비슷한 개념이다. 


디즈니랜드 기념품과 킹스맨 의류의 차이는 품질이다. 보통 영화에 나오는 물건이 상품화되면 코스튬 플레이 이상은 하기 힘들 정도로 품질이 조악하다. 킹스맨의 이름으로 팔리는 옷은 현실 세계에서도 최고급품이다. 킹스맨이 총알을 막던 우산은 스웨인 애드니가, 구두는 조지 클레벌리가, 셔츠는 턴불 앤 아서가, 안경은 커틀러앤그로스가 만든다. 모두 역사와 전통이 있는 최고급 의류 및 장신구 브랜드다. 적어도 소재 면에서는 증권시장 개장 시간에 맞춰 출근하는 투자사 이사님이 출근길에 입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고급스럽다. 


영화 <킹스맨>은 미스터포터에서 판매하는 의류 브랜드 '킹스맨'을 낳았다. <블룸버그 비즈니스위크> 기사에 따르면 이는 영화를 만들기 전부터 계약된 사항이다. 영화 의상 디자이너 아리앤 필립스와 미스터포터 구매총괄 담당 토비 베이트먼이 실무를 진행했다. 이때는 <킹스맨>의 성공 여부나 속편 제작 여부도 알 수 없었지만 '킹스맨' 브랜드는 영화 <킹스맨>의 흥행과 속편 제작 여부와 상관없이 계속 나오기로 계약되어 있었다. 미스터포터 측에서는 킹스맨 브랜드에 ‘코스튬 투 컬렉션’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돈이 벌리는 창구가 다양해지면 사업하는 입장에서는 좋다. <킹스맨> 영화 속 의상이 브랜드화되는 건 21세기와 잘 어울리는 신규 사업이다. 반대로 감독 입장에서 킹스맨 브랜드는 거추장스러운 PPL이 될 수도 있다. 어쩌면 감독은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라는 장면까지만 넣고 싶었는데 브랜드 노출 압박 때문에 "정장은 현대 신사의 갑옷이다"라는 장면까지 찍어서 넣어야 했을 수도 있다. 할리우드 감독마저 PPL에서 자유롭지 못한 걸까. 


<킹스맨 1>에는 반전이 있었다. 킹스맨의 수장 체스터 킹(마이클 케인)이 악당과 한편이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여기에도 반전이 있다. PPL 전략을 처음 낸 사람이 감독이었다는 게 이 이야기의 작은 반전이다. <블룸버그 비즈니스위크>의 크리스 로브자르가 이 과정에 대한 기사를 썼다. 기사에 따르면 매튜 본은 영화에서 파생될 수 있는 보다 발전된 상업적 프로젝트를 생각하다 영화 속 스파이의 옷장을 실제로 만들기로 했다고 한다. 좋은 생각이군요.


킹스맨은 007의 충실한 벤치마킹이기도 하다. 우선 스토리 면에서 그렇다. 정통 영국 정장을 입은 우아한 남자가 싸움도 잘 하고 간간히 여자도 만나고 비밀 무기 자랑도 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세상을 구한다. 거기 더해 007이 또 하나 증명한 게 있다. 스파이 캐릭터가 스타일 아이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남자들은 007이 찬 롤렉스 서브마리너를 차고 거기 007이 실제로 끼운 나토 스트랩을 끼웠다. 007은 양복 입은 남자의 역할 모델에 가까웠다. 옷도 잘 입고 머리도 좋고 육체도 강인한 미남. 인기가 많을 수밖에 없다. 


자신의 인기를 깨달았다면 누구든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007도 예외는 아니다. 지금의 007은 그때에 비해 훨씬 세속적이다. 대니얼 크레이그가 입고 걸치는 스파이 유니폼은 전부 다 협찬이다. 정장은 톰 포드, 속옷은 선스펠, 구두는 크로켓 앤드 존스, 시계는 오메가, 차는 애스턴 마틴. <스펙터>가 개봉할 때쯤 영국 <데일리 메일>은 "제임스 본드는 세상에서 제일 유명한 스파이인 것과 별도로 바쁜 세일즈맨처럼 보인다"라고 썼다. 스펙터의 첫 장면에서 군중 속에 있는 007이 스파이답지 않게 튀는 톰 포드 선글라스를 쓰고 있던 데에는 이런 사연이 있다.


<킹스맨> 시리즈는 007이 증명한 PPL을 조금 더 진지하게 발전시킨 모델이다. 영화 <킹스맨>은 ‘비밀 요원의 옷을 진짜 고급 의류 브랜드로 만들어 판다’는 의류 브랜드 킹스맨을 보여주는 영상물이기도 하다. 이 아이디어가 제대로 구현되려면 세 명이 필요하다. 이야기를 짜는 자, 옷을 입히는 자, 공급책. 매튜 본이 이야기를 잘 만드는 건 이미 검증됐다. 두 명이 더 필요했다.





<에스콰이어> 에 올린 원고입니다. 마감 안에 맞춰 내느라 어색했던 부분들을 조금씩 고쳤습니다. 속편은 내일 올릴 생각입니다. 빨리 보시고 싶으신 분이 계신다면 더 일찍 올릴 수도 있습니다만 그럴 분이 계실 거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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