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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용 Oct 26. 2017

옷 이야기_02

최고의 셋



3인조

<킹스맨>의 의상 완성도를 보여주는 지표는 선글라스다. 007의 선글라스와 킹스맨의 선글라스를 비교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영국의 국적성을 드러낼 거라면 톰 포드 선글라스 같은 건 씌우면 안 된다. 톰 포드가 나쁘다는 게 아니다(개인적으로는 별로 안 좋아하지만). 이건 기호가 아니라 규칙의 문제다. 영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미국 선수를 넣을 수는 없다. 킹스맨 현장 스태프는 007에 비해 의상 이해도가 높다고 짐작할 수도 있다.


매튜 본이 새로 만들기 시작한 변형 007 모델이라고 볼 수도 있다. 매튜 본은 '브리티시 니치 럭셔리' 브랜드의 애호가로 알려져 있다. 영국의 전통적인 셔츠 메이커 턴불 앤 아서는 나와의 메일 인터뷰에서 "매튜 본의 아버지가 우리 브랜드 셔츠를 갖고 있더라"고 이야기했다. 킹스맨의 은거지로 묘사되는 양복점 역시 런던 새빌 로에 실제로 있는 양복점 헌츠맨이다. 매튜 본은 여기서 어릴 때 정장을 맞춘 기억도 있다고 한다. 매튜 본의 환경인 영국의 국적성이 영화를 만드는 데 잘 쓰인 경우다. 


옷을 좋아하고 이해하는 것과 전문 스태프를 꾸리는 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제대로 된 옷을 만들고 입히려면 확실한 이쪽 분야의 전문가가 필요하다. 매튜 본은 아리앤 필립스라는 전문가를 모셨다. 아카데미 의상상 후보에 2회 선정되고 마돈나의 스타일리스트로 활동하는 의상 제작자다. <에스콰이어>는 그녀와의 메일 인터뷰를 통해 <킹스맨>과 그녀의 커리어에 대한 이야기를 알 수 있었다. 


"<킹스맨>에는 대사가 있는 배역이 최소 100명 나와요." 그녀는 영화 한 편에 들어가는 의상 디자이너의 노동량을 설명해주었다. "대본에 따라 달라지지만 <킹스맨>은 저 등장인물이 최소 한 벌의 의상을 입어요. 캐릭터도 20명은 되고, 엑스트라도 있어요. <킹스맨 2>를 위해서 만든 옷은 1000벌 정도 돼요."


그녀에게도 <킹스맨> 같은 프로젝트는 큰 도전이었다. 영화 속 등장인물이 입고 나오는 옷을 대량생산하려면 생각보다 훨씬 기초적인 단계에서부터 시작해야 했다. "영화 의상을 만드는 건 내 일이니까 쉽죠. 영화 의상에서 영감을 받은 의상 컬렉션을 만드는 건 완전히 처음 하는 일이었어요. 전에 해본 일이 아니었지요. <킹스맨 1> 의상과 킹스맨 의류 브랜드를 하면서 가장 중요했던 건 영화에 나오는 원단과 판매하는 옷의 원단이 같아야 한다는 점이었어요." 그녀 역시 이 일을 하면서 처음으로 원단을 발주했다. 영화 속 의상과 실제 판매하는 상품이 똑같아야 했고, 그러려면 대단위의 원단을 확보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킹스맨 1>이 훌륭한 영화인 이유 중 하나는 캐릭터의 현실성 덕분이었다. 영화 초반에 나오는 에그시와 친구들, 킹스맨 시험을 같이 보는 좋은 집안의 자녀,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는 명대사가 나오는 싸움 장면에서의 건달들, 이런 사람들은 굉장히 현실적으로 보인다. 적합한 의상을 입힌 덕분이다. 에그시의 차브(chav)풍 옷차림, 부잣집 아들이 허리에 두른 에르메스 벨트의 H 로고. 이러한 현실의 의상 덕분에 <킹스맨>의 비현실적인 설정에 더 힘일 실렸다. 이 모든 작은 요소가 모두 아리앤 필립스의 의도다. 상업적인 컬렉션 의상을 디자인해야 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본래 역할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영화가 먼저고 컬렉션이 다음이에요. 우리는 이야기의 진행을 돕고 캐릭터를 형성하는 옷을 디자인합니다. 의상은 영화 제작에서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도구 중 하나예요. 의상은 캐릭터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실마리를 줄 수 있어요. 그들의 배경, 영화에서 말하려는 것, 분위기와 느낌까지도요. <킹스맨>에 나온 의상은 모두 그런 기능이 있었고 매튜 본 감독과의 회의를 거쳐서 정해진 옷입니다. 우리의 모든 옷은 그 옷을 입은 우리의 의도를 반영해요. 우리에 대해 많은 걸 말해주죠. 그게 영화 의상 디자인이에요."


아리앤 필립스의 영화 의상 제작 철학은 곱씹어볼 가치가 있다. 그녀의 말대로 옷은 사람의 캐릭터를 형성한다. 동시에 옷은 그 사람이 옷을 입은 의도를 보여준다. 옷과 사람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서로의 이미지를 만든다. 옷이 사람의 캐릭터를 만들지만 사람이 그 옷의 캐릭터를 만들기도 한다. 대표적인 경우가 마크 주커버그의 갭 후디나 스티브 잡스의 이세이 미야케 터틀넥이다. 멋있는 사람, 성공한 사람의 옷은 그게 뭐라도 멋있어 보인다. <킹스맨 1>의 더블브레스트 정장이 인기를 끈 근본적인 이유다. 훌륭한 이야기는 캐릭터에게 정당성을 준다. 캐릭터는 옷을 입고 있다. 이야기 덕분에 옷까지 멋있어진다. <에스콰이어>와 인터뷰를 나눈 로저 드뷔 CEO 장 마크 폰트로이도 말했다. "스토리텔링을 개발한다. 무브먼트나 고급 소재를 넘어서, 이야기를 만들어 우리를 정당화시킨다." 


옷을 이해하는 영화감독과 이야기의 힘을 이해하는 의상 디자이너가 서로의 일을 잘 해내면 영화 속에 나온 멋진 옷이 갖고 싶어진다. 사업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유통 전문가가 필요하다. 실제로 그 영화에 나온 물건을 만들거나 구해 와야 한다. 팔릴 만한 수량의 물건을 가져다 놓아야 한다. 킹스맨 브랜드는 고가니까 비싼 물건이 팔릴 수 있을 만큼 세련된 홍보 전략도 써야 한다. 여기서 영국의 쇼핑몰 미스터포터가 등장한다. 


영화감독이나 의상 디자이너에 비해 유통 브랜드 측의 역할이 약해 보일 수도 있다. 실제로는 반대다. 매튜 본과 아리앤 필립스가 영화 속에서 만들어낸 건 엄밀히 말하면 다 허구다. 스토리와 이미지는 사람들을 설득시킬 수 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사람들에게 돈이라는 자원을 쓰게 할 수는 없다. (옷에 대한) 관심과 재미를 주는 것과 그걸 수익 모델이라는 현실 세계의 사업으로 구현하는 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현대 저널리즘 산업이 마주한 장벽 역시 이 부분이다. 관심을 모으는 데는 성공했으나 수익이 안 난다는 것. 사람들의 관심을 수익으로 돌리는 건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미스터포터의 구매총괄 담당 토비 베이트먼이 이 일을 맡았다. 그는 영국의 패션 유통업계에서 오래 일한 베테랑이다. 1996년부터 영국 백화점 하우스 오브 프레이저와 셀프리지스에서 경력을 쌓았다. 잘될 사람은 처음부터 다른 모양인지 그는 보통 바이어처럼 디자이너의 쇼룸에서 물건을 보고 고르지 않았다. 그는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디자이너 팀과 일하면서 영감을 주는 원단을 함께 벤치마킹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토비 베이트먼이 일하는 미스터포터는 지금 가장 대표적인 고가 의류 온라인 쇼핑몰 중 하나다. 미스터포터가 처음 생겼을 때는 누가 인터넷으로 비싼 옷을 사겠느냐는 의견이 많았으나 사람들의 우려와 달리 순항 중이다. 일찍부터 ‘유통 기업이 미디어 기업이 되고, 미디어 기업이 유통 기업이 된다’는 시장 흐름을 간파한 덕분이다. 

미스터포터의 성공 비결은 크게 둘이다. 하나, 브랜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고유한 쇼핑몰 레이아웃, 물건을 보여주는 방식, 정기적으로 발행하는 종이 신문 모양의 팸플릿 등을 통해 미스터포터만의 정체성이 태어났다. 영국 <에스콰이어> 편집장이었던 제러미 랭미드의 감각 덕분이다. 그는 논란을 무릅쓰고 저널리즘업계에서 의류 유통업계로 넘어가 지금 미스터포터의 브랜드&콘텐츠 디렉터로 일하고 있다.


유통이 미디어가 되고 미디어가 유통이 된다는 말이 미스터포터에서만은 농담이 아니다. 미스터포터가 발행하는 신문에는 단순히 미스터포터의 물건만 나오지 않는다. 그 물건으로 할 수 있는 일처럼 덜 상업적인 소재가 나오기도 하고, 상품 구매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한다. 제러미 랭미드 역시 매거진 <B>와의 인터뷰에서 "더 자유로운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저희는 저희가 좋아하는 옷을 바잉하고 그에 대해 기사를 씁니다. 잡지에서 일할 때는 좋아하지 않는 옷과 관련해서도 기사를 써야 했지만요." 모든 에디터는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싶다’는 꿈을 꾼다. 그 꿈은 실향민의 귀향처럼 이루어질 수 없다. 제레미 랭미드처럼 매체를 떠나 브랜드로 간다면 저널리스트로의 꿈을 이룰 수도 있다. 


미스터포터를 이루는 또 하나의 축은 좋은 물건을 잘 알아보는 안목이다. 무엇을 살 것인가, 어떤 브랜드의 어떤 물건을 사서 미스터포터라는 유통 브랜드의 이미지를 이룰 것인가. 소위 말하는 큐레이션 능력 역시 미스터포터의 핵심 역량 중 하나다. 이 분야를 총괄하는 토비 베이트먼은 의류 브랜드 킹스맨 컬렉션에도 깊이 관여했다. 그 역시 <에스콰이어>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이 프로젝트에 대한 자신의 경험과 의견을 들려주었다. 


"영국의 비밀 에이전트 본부가 새빌 로 양복점에 있다. 첫 미팅에서 이 이야기를 듣자마자 흥분됐습니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동시에 (물건을) 판매하는 '코스튬 투 컬렉션'을 해볼 수 있다는 생각에 말이죠." 토비 베이트먼은 영화에 기반을 둔 의류 브랜드를 만든다는 제의를 망설이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그래도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인데 걱정은 안 됐을까? "매튜 본의 비전과 흥행 성적, 아리앤과 일할 수 있는 기회, 20세기 폭스, 블록버스터 스케일과 호화 출연진… 우리에게는 성공할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그의 자신감대로 킹스맨은 영화로도 브랜드로도 성공했다. "하지만 킹스맨이 우리의 가장 유명한 럭셔리 브랜드가 되고, <킹스맨 1>이 끝나고도 여섯 시즌이나 더 나온 건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큰 성공이었습니다." 




<에스콰이어> 에 올린 원고입니다. 마감 안에 맞춰 내느라 어색했던 부분들을 조금씩 고쳤습니다. 속편은 내일 올릴 생각입니다. 빨리 보시고 싶으신 분이 계신다면 더 일찍 올릴 수도 있습니다만 그럴 분이 계실 거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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