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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용 Feb 09. 2016

어느 날의 책-80일간의 세계 일주

옛날은 다 좋았던 걸까?


<80일간의 세계 일주>에는 값비싼 여행과 귀족적인 낙관이 잔뜩 묻어 있다. 필리어스 포그는 파스파르투와 함께 돈을 펑펑 쓰며 호화롭게 전 세계를 돈다. 젯셋족의 원류 같다. 이것만 보면 역시 옛날은 지금과 달리 낙관과 에너지가 가득했다고 생각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말 그랬을까?


<80일간의 세계 일주>가 출판된 1873년 세계는 최초로 대불황을 체험했다. 그 해 4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수도인 비엔나의 주가가 폭락했다. 폭락은 도미노처럼 이어졌다. 칠레-프랑스-이탈리아-러시아-영국을 거쳐 미국까지 갔다. 이건 역사상 최초의 국제적 금융 위기로 기록된다. 필리어스 포그가 세계화의 문학적 상징물이 되는 동안 실물세계는 국제공황으로 진짜 세계화를 체험하고 있었다. 하지만 80일간의 세계 일주에 나온 당시의 흔적이란 필리어스 포그의 여행 성공 가능성을 점치는 ‘필리어스 포그 증권’뿐이다.


세계엔 다양한 면모가 있다. 낙관과 인권과 기술의 20세기는 이념과 광기와 핵전쟁의 20세기이기도 했다. 필리어스 포그의 시대도 중세도 마찬가지로 장점만큼의 단점이 있을 수 있다. 나는 어떤 회사와 함께 지금의 한국을 ‘신중세시대’라고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연속 인터뷰를 기획하고 진행한 적이 있다. 사실 이건 이름부터가 잘못됐다. 이 대담에 참여했던 역사학자 신명주의 지적처럼 중세는 거의 천 년이다. 그 긴 시간의 의미와 개념을 간단히 빼내서 지금의 고작 몇 가지 요소와 붙일 수는 없다. 아무리 좋게 말해도 그건 개념적으로 비약이다.


움베르토 에코는 <파리 리뷰>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유사성을 이야기할 때에는 아주 조심스러워야 하지요. 한번은 중세와 우리 시대 사이의 유사점에 대해서 에세이를 쓴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혹시 50달러만 준다면 우리 시대와 네안데르탈인이 살던 시대의 유사점에 대한 에세이를 쓸 수도 있어요. 유사점을 찾는 것은 언제나 쉽습니다"


우리는 부정적인 의미로 신중세시대라는 단어를 썼다. 한국의 답답한 부분과 중세의 미개한 부분에서 유사점을 찾아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한국은 세계의 어떤 나라와도 다른 속도와 종류의 변화를 겪었다. 지금은 서울의 승리자들에겐 최고의 시대일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다 가진 그들의 시점만이 역사로 남을지도 모른다. 헬조선 같은 말도 아햏햏처럼 깡그리 잊혀질지도 모른다. 결국 지금을 사는 당신과 나는 뭐가 옳고 뭐가 그른지는커녕 뭐가 남고 뭐가 사라질지도 알 수 없다.


다만 과거를 읽으며 현재를 대입해 미래를 상상하는 건 의미가 있을 것이다. 나는 이 프로젝트의 결과물을 구입했던 소비자들에게 함께 읽기 좋은 책으로 <80일간의 세계 일주>를 소개하는 글을 썼다.  필리어스 포그와 쥘 베른의 19세기 전에는 러다이트의 19세기도 있었다. 헬조선이라는 별명을 가진 한국은 말도 안 될 정도로 훌륭하게 국제 사회에 진입한 나라이기도 하다. 누군가를 옹호하거나 비난하려 하는 말이 아니다. 뭐든 표면 뒤에는 이면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을 뿐이다.


다양한 시점으로 세계를 보는 건 날 잡고 해보시라고 권하고 싶을 정도로 재미있는 일이다. <80일간의 세계 일주>를 보며 당시 상황도 검색해 보는 식으로 하나의 독서가 다른 책의 세계로 가는 산책로가 되길 바란다. <80일간의 세계일주>는 그 길의 첫 코스가 될 것이다.


아까 인용한 움베르토 에코의 말은 이렇게 이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우리 시대와의 유사점을 깊이 있게 찾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끔찍하게 구식이라는 걸 고백합니다. 그래서 아직도 키케로처럼 역사는 삶의 스승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소개에 써둔 것처럼 책읽기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요즘같은 세상에 이런 글을 남들도 좋아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재미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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