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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용 Feb 05. 2016

지-샥, 시대의 마스코트

아이콘은 어쩌다 만들어지는 것 아닐까


지-샥은 카시오가 만든 디지털 손목시계다. 특유의 성능과 디자인 때문에 1983년 처음 선보인 후 계속 인기를 끌고 있다. 생긴 지 34년쯤 된 만큼 지-샥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 시계도 아주 많다. DW-5600은 그 중에서도 제일 오래된 시계다. 1987년에 나왔는데 지금도 디자인이 똑같다. 류현진 선수와 동갑이다.


이 시계의 디자인과 인터페이스는 디지털 손목시계의 표준을 따른다. 시/분/초가 나오는 하단 위로 요일과 날짜가 보인다. 왼쪽 아래의 모드 버튼을 누르면 알람, 타이머, 스톱워치 기능 항목으로 넘어간다. 알람을 끄고 켜는 기능은 오른쪽 위의 버튼으로 진행한다. 오른쪽 아래 버튼으로는 불을 켠다. 시간을 바꾸거나 알람/타이머 시간을 맞추고 싶으면 왼쪽 위에 움푹 들어가 있는 어드저스트 버튼을 누르면 된다. 버튼 네 개와 기능 네 개. 단순한 기능과 직선적인 인터페이스다.


이 단순한 인터페이스에 손목시계의 긴 전통이 들어 있다. 방금 언급한 기능은 모두 기계식 시계가 구현하려던 것이다. 초기 손목시계의 기본적인 기능은 시간과 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거기서 출발해 초침을 넣고 그에 이어 날짜를 알려주거나 경과 시간을 확인하는 기능을 붙였다. 그 모든 기능이 밤에도 보여야 했으므로 어떤 시계는 야광 기능을 붙이기도 했다. 손목시계라는 디바이스의 인터페이스가 이렇게 재해석된 셈이다. 그렇게 보면 지-샥의 인터페이스는 꽤 보수적이다.


그 인터페이스를 감싼 것이 지-샥의 케이스다. 울퉁불퉁한 플라스틱 케이스는 이들의 아이콘이 되었다. 튼튼한 케이스와 뻔뻔한 자기소개는 지 샥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이다. 지-샥은 디지털 무브먼트의 앞뒤로 보호구 역할을 하는 우레탄 부품의 돌출을 숨기지 않는다. 이 디테일은 시계에 미치는 충격을 막아주는 안전장구인 동시에 시계의 캐릭터를 증폭시키는 액세서리 역할을 한다. 자세히 보면 더 그렇다. 대놓고 이것저것 쓰여 있으니까. 카시오라는 브랜드명보다 크게 쓰여 있는 것이 '프로텍션'이고, 그것보다 더 크게 쓰인 것이 '지-쇼크'다. 그 위에는 쇼크 레지스트라는 설명까지 붙어 있다. 스포츠카의 본넷 위에 '스포츠카', 문 옆에 '빠름', 트렁크 쪽에는 '밟는 대로 튀어나감'이라고 쓰여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런 자랑이 적당히 멋있고 귀여워 보이는 이유는 지-샥이 젊은 시계이기 때문 아닐까. 이 시계는 탄생 배경부터 신나는 구석이 있다. 지-샥의 요람은 비공식 사내 벤처같은 것이었다. 1981년 카시오의 개발부서 소속 이베 키쿠오는 상품기획자 마츠다 유이치와 니카이도 타카시를 영입해 '프로젝트 팀 터프'를 만든다. 목표는 단순했다. 안 망가지는 시계. 기준도 단순했다. 트리플 텐. 1)10m 높이에서 떨어져도 멀쩡하고 2)기본 10기압(통상 수심 100m에 수준에 해당한다)에서 견디는 내충격성, 3)10년 가는 배터리.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니었다는 게 중요하다. 부장님이 아무리 시켜도 이런 건 안 나온다.


원래 아등바등하면서 해낸 일보다 좋아서 쿵짝쿵짝 시작한 일이 더 결과가 좋다. 지샥이 딱 그런 경우였다. 지샥의 산파는 젊은 재능이었고, 그 재능 뒤에는 인류 역사상 손꼽히는 번영기인 20세기 후반이 있었다. 시대 전체를 감싼 풍요롭고 낙관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그 덕분에 이들은 회사의 어른들과 스위스의 터줏대감들과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시계를 바라볼 수 있었다.


지샥의 개발자들이 생각한 시계는 DW-5600같은 것이었다. 거친 환경에서도 잘 작동하는 기계. 카시오가 옛 디자인을 버리지 않은 덕에 우리는 그 시기의 지샥을 아직도 만나볼 수 있다. 코드명도 그때와 똑같은 지샥 DW-5600은 초기 지샥이 어떤 관점으로 만들어졌는지 볼 수 있는 일종의 사료에 더 가깝다. 가격도 나쁘지 않다. 이 시계는 얼추 6~7만원 선에서 구할 수 있다.


키아누 리브스가 찼던 지-샥. 무소유의 대명사니까 저 날 바로 버렸을지도 모른다.


이 시계는 20세기 후반의 디자인 아이콘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일본의 터프가이 지망생들이 만든 이 시계에 세계의 터프가이들이 열광했다. 대표적인 예가 <스피드>의 키아누 리브스다. 달리는 버스에서 곤란한 상황에 놓인 키아누 리브스의 손목에는 곤란한 상황도 잘 견디는 DW-5600이 감겨 있었다. 처음 보는 쿨하고 튼튼한 생김새에 값도 별로 안 비쌌으니 이 시계가 인기를 끌었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시간보다 냉정한 소비자는 없다. 좋은 물건, 누군가에게 필요한 물건은 어떻게든 살아남아 영광과 생명을 이어간다. 시간이 지나며 시들기 때문인 건지 남자는 시간이 들어도 꼿꼿하게 가치가 살아 있는 물건을 좋아한다. 지샥처럼, 지샥의 터프한 정신처럼. 지샥을 차는 우리는 평생 이 충격흡수 시계가 받을 충격의 1/100도 못 받고 살 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이런 시계를 산다. 200m 방수나 30년의 역사처럼 눈에 보이는 지표로 충동구매라는 불합리를 합리화하면서. 그것도 남자들이 살아가는 방법일 것이다.




몇 년 전에 어떤 웹 매거진에 보낸 글입니다. 주제는 남자의 물건이었던 것 같네요. 요즘같은 세상에 남녀가 어디 있겠습니까. 저 시계 여자가 차도 멋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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