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가서 먹기만 할 거야?
해외여행 가시는 분들 정말 많다. 내가 느끼는 지표는 인천공항 주차장의 빈 자리다. 3년 전 정도만 해도 명절에만 빈 자리가 없었는데 요즘은 언제 가도 빈 자리가 없다. 대한항공 카운터와 가까운 주차장 A구역에 차를 댈 확률이 대한항공 비즈니스클래스로 업그레이드될 확률보다 낮을 것 같다. 그 많은 분들은 가셔서 뭘 할까? 돈과 시간을 써서 다른 곳으로 나가지만 결국 남과 같은 것만 보고 오는 건 아닐까? '이것만은 꼭 보라'는 걸 보는 여행도 좋지만 다른 방식의 여행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려면 뭘 보고 무엇을 참고 삼아야 할까?
<긱-아틀라스>가 정답이 될 수는 없겠지만 하나의 제안이 될 수는 있겠다. 작가인 존 그레이엄-커밍은 과학과 수학을 좋아하는 프로그래머다. 런던 과학 박물관의 차분기관을 보면 눈물을 흘릴 정도로 과학을 좋아한다고 한다(그의 말에 따르면 차분기관은 '움직이는 수학이자 행동하는 연산'이라고). <긱-아틀라스>는 이런 책이 나온 적이 없어서 본인이 쓴 책이다. '유명한 시인, 화가, 작가가 살던 집은 쉽게 찾을 수 있지만 방문할만큼 과학적으로 가치 있는 장소를 찾기란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라는 작가의 지적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왜 아무도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이 책에는 과학과 관련된 세계의 명소 129곳이 나와 있다. 장소에 얽힌 기술적 성과와 의미를 보면 인류 과학 문명의 성소라고 해도 될 것 같다. 팔로 알토의 HP 차고는 보통 사람들에겐 큰 의미가 없어 보일지 몰라도 실리콘밸리의 발상지다. 컴퓨터 문명을 종교라고 치면 싯다르타의 보리수나무 아래같은 장소인 것이다. 뉴욕 맨해튼의 온갖 부티크와 레스토랑 사이로는 뉴욕시 기계 장인 협회에서 운영하는 존 M. 모스맨 자물쇠 컬렉션도 있다. 대만의 타이베이 101은 이 나라의 대표적인 마천루로 유명하다. 하지만 꼭대기에 건물의 진동을 방지하는 660톤 무게의 진자가 있으며 그게 일반인에게도 공개된다는 사실은 크게 유명하지 않다.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여행지를 과학사적 개념으로 바라보는 건 과학도가 아니어도 흥미롭다.
<긱-아틀라스>는 실용적인 정보를 소개하는 방법도 보통 여행 책과는 다르다. 책 속 여행지의 위치는 주소가 아니라 좌표로 표시되어 있다. '페네뮌데 기술 역사 박물관, 페네뮌데, 독일' 까지 쓰고 54° 8' 16" N,13°46'8"E라고 나와 있는 식이다. 추가 정보를 표시한 아이콘은 네 종류다. 무료입장, 어린이와 방문하기 좋은 장소, 편의시설 사용 가능, 날씨에 상관없이 방문할 수 있는 장소. 네바다 핵 실험장 같은 곳은 아이와는 방문할 수 없다. 여행 책을 보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보통 여행책의 분류 방법과는 조금 다르다. 과학 애호가가 여행지를 바라보는 관점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사실 어떤 사람의 관점은 작은 기준이나 설명 방식처럼 사소한 곳에서 드러난다. 이 책에는 과학기술 문명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의 싱싱한 관점이 들어 있다. 그걸 보는 것도 이 책의 재미 중 하나다.
그러므로 이 책의 진짜 교훈은 이런 여행을 가시라는 게 아니라 세상에는 이런 여행 방법도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존 그레이엄-커밍 씨처럼 차분기관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여행 역시 조금 징그럽긴 해도 아주 멋진 취향이다. 세상은 온갖 의미로 가득하다. 당신의 시점에 기반한 여행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훌륭한 것이다. TV 프로그램이나 파워 블로거가 제안하는 즐거운 여행의 방법이라는 것도 있겠지만 서점의 안 팔리는 책들을 찾다 보면 여행과 세상을 바라보는 다른 시각을 만날 수도 있다. 그나저나 당신은 무엇을 보면 눈물을 흘리시는지?
+이 책의 영문판 표지는 뭐랄까 정말 ‘긱’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