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찬용 Mar 11. 2016

정기고의 시대정신

가사와 세계


'썸'은 모르기 힘든 노래다. 2014년 연간차트 1위, 음원차트 100위 안에는 67주 동안 있었다. 새 학기가 오면 초면이라 설레는 사람들이 또 한참 부를 것이다. 20년쯤 후 <응답하라 2014>같은 게 나왔을 때 삽입곡으로 쓰일 확률도 높다(캐나다구스같은 옷과 함께). 지금은 한글도 못 쓰는 어린아이가 리메이크해서 부른 후 그때 그 노래라면서 음원차트에 올라가지 않을까.

이 노래를 부른 정기고 씨는 2002년부터 활동한 베테랑이다. 그는 데뷔 후 12년을 보내고 나서야 메가히트를 만들어냈다. 본인의 보컬 색이 그때의 취향과는 맞지 않아서였을지도 모른다. 힘차고 날렵한 보컬의 시대를 지나 한국 시장은 섬세한 목소리에도 대중적인 지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정기고 씨의 목소리는 의 느슨한 분위기와 굉장히 잘 어울린다. 소유 씨 역시 부드러운 목소리로 정기고 씨와 좋은 조화를 이룬다. 임창정 씨와 이은미 씨같은 가수가 을 부르면 굉장히 달라질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다.

'내꺼인 듯 내꺼 아닌 내꺼같은' 이라는 희대의 가사는'뭐라는 거야. 지금 나랑 뭐 하자는 거야' 싶다. 생각할수록 그렇다. 소개팅남이 "너 말이지 내꺼인 듯 내꺼 아닌..."같은 말을 했다고 생각해 보면 더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기고 씨와 소유 씨가 그 말을 부드럽게 뱉을 때만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마취 기운에 집어넣고 빼내는 내시경처럼 어느새 그 가사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와 있다.

이 가사는 사랑이 아니어도 지금과 잘 어울린다. 기술이 발달하고 세상이 바뀌면서 우리가 알던 여러 가지 것들이 모습을 바꾸고 있다. 기사형 광고는 기사인듯 기사 아닌 기사같은 광고다. 에어비앤비는 내집인듯 내집 아닌 내집같은 숙박 서비스고 페이스북 친구들은 친구인듯 친구 아닌 친구같은 지인이다. 엄마 때는 노력하면 가질 수 있던 모든 것이 이제는 내꺼인 듯 내꺼 아닌 내꺼같은 날들이 됐다. 우리는 정규직인듯 정규직 아닌 정규직같은 계약직을 살면서 소주인듯 소주 아닌 소주같은 순하리를 마시다 서울인듯 서울 아닌 서울같은 근교의 광역도시로 출퇴근하는 삶을 살고 있다.

세상이 변한 건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보기 어렵다. 기왕 사랑하실 거면 확확 표현하시라고 권했던 적도 있지만 의 정서도 충분히 합리적인 면이 있다.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며 그냥 사는 것도 힘든데 이상한 남자들이 드글거리는 이 도시에서 잘 될지도 모르는 연애에 매번 전력을 다하는 건 무척 어렵다. 다만  속의 남자와 여자도 결국 을 넘어선 사랑을 원한다. 요령이 바뀌어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의 세상이어도 사랑이 덜 귀해지지는 않는 모양이다. 모두 사랑하는 계절 되시길 바란다.




앱 매거진 <뷰티톡>에 연재하는 원고를 여기 옮겨 둡니다. 노래 가사를 빌어 말하는 일종의 연애 칼럼입니다. 연애도 여자도 노래도 화장품도 잘 모르는데 이런 일을 하게 됐습니다. 당연히 부족할 겁니다. 어떤 형태의 지적이든 감사히 받겠습니다.

이 브런치에는 연재 시점의 2주 후인 매주 금요일에 원고가 올라갑니다. <뷰티톡>은 앱스토어와 구글플레이에 있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담배와 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