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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용 Mar 09. 2016

담배와 나

지금 생각해도 나쁘진 않았지만


2000년 12월 25일은 내 의지로 담배를 피운 첫 날이었다. 방의 베란다 창문을 열고 함께 살던 외삼촌의 타임리스 타임을 한 대 훔쳐서 불을 붙였다. 처음 피우는 담배는 '이게 뭐야'싶은 맛이 났다. 담배의 맛보다는 창 밖의 풍경이 더 기억난다. 빨리 시간이 지나갔으면 싶은 그냥 그런 크리스마스의 밤이었다. 나는 크리스마스를 좋아했던 적이 별로 없었다.


친한 친구가 몇 번 권했을 때는 피우고 싶지 않았다. 담배를 피운다고 뭔가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었고 담배를 피운다고 더 멋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여기까지 적고 나니 담배를 피우기 전의 내가 담배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었구나 싶어진다. 나는 그 후 14년 동안 기세 좋게 줄곧 담배를 피웠다.


담배를 피우지 말라는 모든 종류의 이야기를 싫어했다. 내가 의지로 내 몸을 써서 내 몸을 더럽히겠다는데 누가 무슨 상관이야, 라고 생각했다. 담배가 몸에 좋을 거라고 생각했던 적은 없었지만 몸에 아주 많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뭐든 과하면 몸에 나쁘다. 운동, 과도한 생각, 술, 섹스, 채소 섭취 혹은 고기 섭취 등의 편중된 식생활, 뭐든 과했을 때가 나쁜 거고 담배도 그 중 하나이며 그 생각에는 아직도 변함이 없다. 나는 내가 담배를 피우지 않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담배와 함께 하는 모든 순간이 좋았다. 아무도 없는 도로에서 차 창을 열고 담배를 피우며 운전하던 시간, 격렬한 시간을 보내고 지친 채 누워서 담배를 나눠 피우던 순간, 경치 좋은 곳에서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것처럼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던 때 같은 건 지금 생각해도 꽤 훌륭한 기억이다. 한때 친했던 친구와 오랜만에 만나 이야기하는 추억 같다.


어쩌다 담배를 피우지 않기로 했는지는 어쩌다 담배를 피우기로 했는지의 일처럼 모호하다. 2014년 1월의 제네바에서도 담배를 엄청나게 피웠으니까 아마 그 후의 일일 것이다. 아, 어떤 책을 읽고 난 다음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나를 금연의 길로 미끄러뜨린 책의 이름은 <위험한 자신감>이었다. 책에 따르면 인간을 구성하는 모든 능력 중 향상된 것은 하나도 없으나 폭발적으로 강해진 심리적 요소만 딱 하나 있다고 한다. 자신감. 그 자신감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파생상품처럼 안일하게 부풀려진 것이었다.


그 책에는 금연에 대한 이야기도 나와 있었다. 금연과 자신감은 '건강에 대한 자신감' 카테고리에 속한다. 저자는 ‘사람들이 담배를 끊지 못하는 이유는 ‘나는 마음만 먹으면 쉽게 담배를 끊을 수 있다’는 그릇된 자신감 때문’이라고 했다. 반박할 수 없었다. 나는 그 책을 읽고 며칠 지나지 않아 약국에 니코틴 패치를 사러 갔다. 담배를 끊기 위해서 내 스스로 나는 니코틴 중독자임을 인정한 것이었다. 사실 전엔 니코틴 패치를 붙이는 것도 늙어 보여서 싫어했다. 나는 비합리적인 편견 덩어리다.


담배를 피우지 않기로 한 또 하나의 큰 이유는 내가 냄새 나는 아저씨가 되고 있으리라는 확신 비슷한 감정이었다. 누구나 늙는다. 천천히 늙거나 남들 보기에 안 늙을 수는 있어도 누구나 해가 지날수록 차곡차곡 나이가 쌓인다. 몸도 그만큼 덜 건강해지거나 건강을 잃기 쉬워진다. 몸이 덜 건강해지는 신호 중 하나는 냄새다. 난 중년의 담배에 붙는 고뇌나 중후같은 말들은 그 냄새를 직접 맡지 않은 누군가가 지어낸 말이라고 생각한다. 담배 냄새는 입과 발과 머리카락의 악취에 섞여 고유명사처럼 된 ‘담배 피우는 아저씨 냄새’를 강화시킬 뿐이다. 늙는 게 싫다는 게 아니다.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 어쩔 수 없는 일에 더 안 좋은 걸 갖다 붙이고 싶지는 않았다.


담배를 피우지 않기로 한 결심은 의외로 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담배를 피우지 않기로 한 현실적인 이유 중 하나는 건강이 안 좋아지니까 일하기가 힘들어서였다. 일-스트레스-담배-건강 악화-스트레스 심화-체력 저하-계속되는 일-스트레스...의 악순환에서 나를 꺼내 놓고 싶었다. 그러면 내가 몸을 건강하게 해 가면서까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 나는 곧잘 짜증을 내면서도 내 일이 소중했던 걸까. 업무용 건강은 내 의지일까 의무감일까. 일을 잘 하기 위해 담배를 끊었다면 일을 안 할 때는 담배를 피울 것인가. 아무튼 나는 내 일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결론을 내고 나는 조금 놀랐다.


의외의 일은 이어졌다. 담배와 멀어지다 보니 담배의 맛이 점점 없어지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건 담배를 피우지 않게 하는 강력한 동력이었지만 조금씩 허탈하기도 했다. 엄청나게 맛있게 피우던 게 그렇게 맛없어지다니, 나와 담배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나는 아직도 똑같은 것 같은데 내 미뢰는 어떻게 변해버린 걸까.


담배값 인상 역시 담배를 안 피우기로 한 큰 동기였다. 돈도 돈인데 구실이 마음에 안 들었다. 담배가 몸에 그렇게 해로운 거라면 중앙정부에서 진작 피우지 말게 했어야 하는 것 아닐까 싶었다. 요즘의 주장처럼 담배가 마약이라면 만들지도 팔지도 말아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럴 순 없더라도 담배가 중독성 마약이라면 국가의 누군가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을 지거나 사과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거대 조직이라는 게 으레 그렇듯 눈에 보이는 깔끔한 인정같은 건 없었다. 그냥 세금이 붙어 담배값이 올랐다. 중독된 사람들은 중독물질이 얼마든 사니까 그 일은 꽤 치사해 보였다. 아무튼 덕분에 나는 담배를 피우지 말아야겠다고 한번 더 다짐했다.


결론적으로 생각해보면 내게 담배는 소년의 액세서리였다. 어른인 척 하는, 어른이 되고 싶은 소년의 액세서리. 어릴 때의 담배냄새는 젊음의 냄새일지도 모른다. 고민하고 밤새 담배를 뻑뻑 피우는 시니컬한 소년(나만 그렇게 생각한다면 미안합니다)의 냄새. 하지만 난 더이상 소년이 아니었다. 담배 냄새도 금방 분해시키던 내 젊은 몸은 21세기 초반의 여러 가지 일들과 함께 내 곁을 떠났다. 어른이 되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손댄 기호품이니까 어른이 된 지금은 손을 떼도 될 텐데, 마음은 마음이고 화학은 화학이라서 쉽지 않았다.


여기까지가 2014년 말에 적어뒀던 일기다. 만으로 1년 조금 넘게 지났다. 담배는? 이제 안 피운다. 하나도 안 피웠다고는 못 하겠다. 2015년에 두 번 정도 만취했는데 그때 한두 번씩 담배를 찾아 불을 붙였다. 안타까울 정도로 맛이 없었다.


아직 나는 담배 끊었다는 말을 쓰기를 꺼린다. 언제 무슨 일이 생겨서 다시 담배에 손을 대 가장 독한 것만 피우는 체인 스모커가 될 지 모른다. 담배의 장점도 아직 기억하고 담배 피우는 사람들 특유의 유대도 인정한다. 그래서 지금은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고만 이야기한다.


담배를 피우지 않아서 가장 좋은 건 냄새나 건강이 아니라(이것도 물론 좋다) 생필품과 생활의 절차가 하나 줄었다는 점이다. 아침에 나갈 때 챙길 게 줄어드는 것, 새벽 두 시에 한 대만 더 피우고 싶은데 드는 기분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것, 처음 가는 공항에서 어떻게든 한 대 피우고 게이트로 가려 빨리 걷는 것, 이런 일에서 벗어난 것이 가장 기쁘다.


혹시 담배를 끊으시려는 분이 계신다면 담배를 안 피우는 것에도 나름의 장점이 있다는 걸 기억해주시기 바란다. 그 장점은 생각보다 금방 드러나고 생각보다 오래 느껴진다. 그리고 담배도 나름의 효용과 장점이 있으니 안 끊어진다고 너무 자책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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