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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용 Mar 07. 2016

좋음과 비쌈

시계를 감아보며 생각했던 것들


시계 담당 에디터로 4년 조금 넘게 일했다. 시계를 좋아했던 건 아니었는데 그렇게 됐다. 만화 <디트로이트 메탈 시티>의 클라우저 2세 네기시도 사실은 기타팝을 좋아했다. 나는 시계 페이지를 만들며 종종 네기시를 떠올렸다.


하려면 알긴 알아야 했다. 엄청나게 대단한 일은 아니라고 해도 이름 달고 내보내는 페이지에 속아 쓰는 말을 채우고 싶지 않았다. 과수원 사장님의 직업 윤리가 이런 걸까. 결과적으로 좋은 시계 페이지를 만들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시계의 보도자료에는 좋은 말만 있었다. 단점은 안 쓰여 있다는 점에서 자기소개서와 비슷했다. 하긴 내가 자기소개서를 써도 '50%는 과장이고 40%는 가짜입니다'라고는 안 하겠지. 보도자료가 다 그렇다는 뜻은 아니다. 내 자기소개서도.


마음에 안 드는 게 있긴 했다. 손목시계가 약 300만원쯤 되면 '합리적인 가격의 명품'이라는 말이 붙는다. 난 이 표현이 싫었다. 그 합리가 누구 합리인지 대체 알 수 없었다. 내가 보기엔 되게 비합리적인데. 물론 세상엔 670만원짜리 시계를 보고 '이정도면 괜찮네' 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일시불로 계산하고 경쾌하게 귀가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 싱그러운 그 삶도 기꺼이 존중하지만 그게 세상의 전부가 아닌 것도 사실이다. 아주 일부의 합리를 대충 뭉쳐서 밑도끝도없이 합리적인 가격이라고 말하는 건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일 덕에 내 흥미나 연소득을 아득히 뛰어넘는 시계를 많이 본 건 좋은 경험이었다. 시계 박람회가 열리는 바젤, 제네바, 홍콩도 몇 번 갔다. 그래서 나는 저 도시들의 이름이 박람회장처럼 느껴진다. 종일 각 브랜드의 부스에 가서 시계를 차보고 보도자료를 들고 다녔으니까. 그때도 궁금했다. 고가 시계는 좋아서 비싼 걸까 비싸서 좋은 걸까. 그 질문은 숙소의 침대에 누워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바젤월드같은 곳에 프레스 자격으로 가면 바이어나 프레스를 위해 마련된 뒷방에 가서 신제품을 차 볼 수 있다. 시계 애호가들에게는 꿈같은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하루에 시계 수십 개를 릴레이하듯 차다 보니 나는 점점 무뎌졌다. 시계는 기본적으로 몸과의 접촉면이 적어서 한번 차봐서는 좋은지 잘 모른다. 거기 더해 정말 튼튼한지, 보석도 잘 붙어있는지 알려면 오래 차봐야 한다. 잠깐 차본 후 이 시계의 어디가 좋고 뭐가 별로인지 말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니 나는 이 자리에서라도 내가 시계에 대해 전문가는 못 된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싶다. 접해본 시계의 수가 쌓이다 보니 시계에 대한 관점이 생긴 정도다.


세상 모든 물건이 그렇듯 시계에도 좀 치사해 보이는 장삿속이라는 게 있다. 하지만 고급 시계가 비싼 게 상술 때문만은 아니다. 소비자의 행동을 불러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나는 비싼 시계가 비싼 이유는 크게 둘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정말 희귀한 재료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비싼 시계는 비싼 소재를 재료 삼아 비싼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제작한다. 고가 손목시계의 가격에도 나름의 논리는 있다. 금 케이스는 스테인리스스틸보다 비싸다. 초시계(크로노그래프) 기능이 붙는다면 시간만 보이는 시계보다 비싸다. 옆에 있는 버튼을 누르면 현재 시간을 종소리로 알려주는 기능(미니트 리피터라고 부른다)을 구현할 수 있는 시계 브랜드는 많지 않다. 이런 건 굉장히 비싸다.


복잡한 시계를 계속 들여다보면 신기한 기분이 든다. 동전만한 케이스안에 먼지만한 톱니바퀴들이(과장이 아니다) 규칙적으로 돌아가거나 초를 재거나 공을 때려서 시간을 알려주는 걸 보면 문명의 진보가 손등 위에 올라간 거구나 싶어진다. 고가 사치품에 적대적인 입장이어도 그 기술에 눈길을 끄는 요소가 있다는 사실만은 부정하기 어렵다. 이게 비싼 가격을 이루는 한 축이다. 하지만 사람 인人자처럼 하나의 축만으로는 설 수 없다.


공급자는 가격을 일방적으로 정할 수 없다. 비싸면 안 사면 된다. 안 팔리면 가격은 내려간다. 요즘 경기가 안 좋아서 물건 가격을 낮춘 명품 브랜드도 있다. 즉 고급 시계 가격이 비싼 근본적인 이유는 사람들이 그 시계의 X값을 납득하기 때문이다. '이 브랜드 시계는 이러니까 이 값이야'라는 이야기가 성립되어야 그 시계가 그 값에 팔린다. 조금 어려운 말을 쓰면, 고가 기계식 시계는 개인의 인식에 따라 가치가 급변하는 희귀한 특징이 있다.


손님을 설득하는 것이야말로 시계 브랜드의 아주 중요한 역량이다. 그건 아주 미세하고 추상적인 영역이다. 광고든 화보든 동영상이든 멋진 이미지를 만드는 것. 역사를 유지하고 되새기는 것. 깊은 바다로 들어가는 것. 우주에서 뛰어내리는 것. 예술가를 소재로 한 한정판을 만드는 것(이 말도 어폐다. 세상에 무한정판이 어딨어). 승마 대회나 빈 필하모닉 신년 음악회처럼 비싸 보이는 행사에 단독으로 광고를 넣는 것. 모두 브랜드 이미지의 일부다. 브랜드 이미지는 이 브랜드의 심리적 가치를 만든다. 마음 속에만 있는 모호한 가치가 현실 세계의 가격에도 영향을 미친다. 나는 그게 늘 신기했다.


심리적 납득은 섬세해서 깨지기도 쉽다. 스위스의 기계식 시계 업계는 일본이 만든 쿼츠 무브먼트 때문에 말 그대로 고사 직전까지 갔다. 지금의 고가 시계 업계는 스위스 시계의 역사에 남을 천재 사업가들이 재건한 것이다. 이들은 위험을 무릅쓰며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고 수익과 조직 구조를 고쳐서 기계식 시계의 새 중흥기를 열었다. 그래서 시계를 만드는 사람들도 자신들이 만들어 파는 것들이 연약한 지반 위에 있는 걸 안다. 지금의 애플 워치를 비롯한 웨어러블 디바이스는 스위스의 시계 업계들에게 찾아온 새로운 라이벌이다. 내가 마지막으로 바젤에 갔던 2015년에도 구름처럼 다가오는 불안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산악 상업국가 스위스 사람이 그렇게 쉽게 망할 것 같지는 않다.


시계 담당 에디터를 몇 년 해본 지금은 세상에 기계식 시계처럼 비싼 물건은 하나쯤 있어도 될 거라고도 생각한다. 세상엔 비싸야 하니까 비싼 물건이나 서비스라는 게 있다. 소중한 자리를 기념하고 싶은데 세상에 제대로 된(그래서 좀 비싼)식당이 하나도 없으면 그것도 곤란하다. 시계도 마찬가지다. 살다 보면 한두 번쯤 몇 달치 월급 정도 되는 걸 손목에 두를 정도로 크게 기념하고 싶은 일이 생길 수 있다. 시계 회사들의 말처럼 삶의 특별한 순간을 기념하는 물건이 하나쯤 있는 게 나쁠 리 없다. 과한 게 나쁜 거지 있는 건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좋은 시계라는 검색어로 들어오신 분의 헛고생을 막기 위해 약간의 조언을 남긴다. 예물이라면 오래 전부터 유명했던 브랜드의 안 튀는 물건을 사시길. 브랜드의 진짜 역사는 홍보되는 역사가 아니라 소유주의 역사임을 명심하시길. 팔지 않을 걸 알지만 내가 살 시계의 중고 시세를 확인해보시길. 소재, 기능, 인지도 등 나만의 필터를 만드시길. 그에 따라 내게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순위를 매기시길. '가격 대 성능비'같은 말에 현혹되지 말고 기왕 무리하시려면 확 무리하시길. 정확하고 자세한 정보는 (이런 포스팅을 포함한)검색 말고 전문 잡지에서 확인하시길. 그리고 마지막. 사실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으니 시계 못 산다고 위축되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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