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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용 Sep 07. 2020

김종인의 손목시계-5

마지막회

냉전 후 동독 지역에서 시작된 시계의 청사진이 한반도 중부까지 왔군요.


김종인 선생님(호칭이 너무 길고 가변적이라 이걸로 하겠습니다)의 시계 이야기 마지막 시간. 김 선생님의 시계는 왜 태엽을 감도록 만들어졌을까? 몇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기계식 시계계의 해묵은 규칙이다. 기계식 손목 시계는 구시대의 산물이기 때문에 나름의 엄격한 기준이 있다. 우선 남성용/여성용으로 구분된다(구시대의 산물이라는 점을 기억해주시길 바란다). 남성용은 또 네 가지로 구분된다. 파일럿 워치, 다이버 워치, 드라이빙 워치, 그리고 드레스 워치. 

드레스 워치, 드라이빙 워치, 파일럿 워치, 다이버 워치의 좋은 예들.


김 위원장의 시계는 드레스 워치에 속한다. 여기서의 ‘드레스’는 ‘드레스 업’처럼 갖춰 입는다는 의미다. 옛날 서양 남자가 갖춰 입는 거라면 정장, 즉 정장에 차는 시계가 드레스 워치다. 온갖 자본가나 고관대작들도 나이키를 신는 지금이지만 예전에는 정장과 관련된 여러 가지 원칙이 있었다. 정장의 한 부분에 속하는 드레스 워치의 원칙은 대충 이렇다. 케이스는 골드나 플래티넘. 모양은 원형. 러그(케이스 밖에 설치되어 스트랩을 고정시켜주는 부분)는 일자. 스트랩은 가죽. 버클은 핀 버클. 무브먼트는 매뉴얼. 김종인의 랑에 1 역시 드레스 워치의 고전적 기준을 벗어나지 않는다. 형식미에서 합격선이라고 볼 수 있겠다.


실질적인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기계식 시계는 귀금속인 동시에 소형 정밀 기기다. 시계의 태엽이 자동으로 감기려면 별도의 오토매틱 모듈이 필요하다. 오토매틱 모듈은 피자의 토핑 추가처럼 보통 무브먼트의 아래에 덧붙이는 경우가 많다. 어느 모듈이든 장치를 추가할수록 시계가 커진다. 시계가 커지면 착용감이 나빠진다. 김종인의 랑에 1 역시 날렵한 생김새와는 달리 두께가 1 cm 에 달한다. 김 선생님의 랑에 말고도 많은 기계식 시계는 사실 꽤 두껍다(현대 기계식 시계의 숙제 중에는 두께와의 싸움도 있지만 이건 또 완전히 다른 이야기니까 궁금하신 분 계시면 다음에 이어 하겠습니다).


즉 랑에 1이 태엽을 감게 된 이유는 전통과 기능과 사용 편의성과 자사의 정체성 등을 모두 고려했기 때문이다. 기계식 시계의 전통, 드레스덴의 특징을 보여주기 위한 시각적 장치(사각 창)삽입, 어느 정도 타협한 두께와 지름. 이 모든 고민이 시계 하나에 들어가 있다고 봐도 될 듯하다. 


이 모든 고민이 시계 하나에 들어 있다고 생각하면 좀 신기하긴 하다.


김 선생도 작센풍 밸런스를 마음에 들어 한 것 같다. 전체 공개된 일반인용 뉴스만으로도 2004년부터 김 선생님이 랑에 1을 차고 언론에 등장한 걸 확인할 수 있다. 선대위장, 전 의원, 전 경제수석, 국민행복추진위원장, 비대위 대표, 비상대책위원…직함이 수없이 바뀌는 중에도 랑에 1은 김 선생 곁에 있었다. 2016년에 이슈가 되기 훨씬 전부터 랑에 1은 김 선생님과 함께였다. 일간지 기자님들이 그때 찾아냈을 뿐이다.


김종인과 랑에 1. 오래 찼다는 말은 정말같다. 그리고 은근히 안경이 계속 바뀐다. 숨은 멋쟁이(?).


애초에 이 원고가 이렇게 길어진 이유가 따로 있었다.  ‘고가 시계’라는 비판에 대한 김종인의 해명 때문이었다. 김종인 측은 이 시계가 알려지자 ‘96년에 선물 받아 차고 있다.’ ‘그때는 그렇게까지 고가는 아니었다.’ 라고 말했다. 이 말들을 근거 삼아 생각해보았다.



2004년부터 차고 계신 게 확인되었으니 나는 김 선생이 이 시계를 1996년에 입수하신 건 맞다고 생각한다. ‘1996년’을 꼭 짚어 말한 것부터 좀 신기하잖아. 김 선생은 1996년 11월부터 1997년 1월까지 알렉산더 폰 훔볼트재단 초빙교수로 독일에 머물렀다. ‘대학 시절 같은 기숙사를 쓰다 지금은 의사가 된’(이라는 말을 실제로 했다) 친구에게 1996년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걸로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우정은 좋군. 


김 선생님은 시계의 가격을 두고 ‘그렇게까지 고가는 아니었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그렇게까지 고가는 아니었고’ 진짜 엄청난 고가였다. 1994년 출시 당시 랑에 1 플래티넘의 가격은 37,000DM이다. DM은 이제는 쓰지 않는 '도이치 마르크'다. 도이치 마르크라니 잠깐 아련해지는군...아련한 감정을 뒤로 하고 계산을 해 보았다. 1994년 10월 25일 (랑에 1 출시일)기준 DM-USD 환율과 USD-KRW로 계산하면 37000DM은 약 1967만원이다. 


고가 시계는 특소세 과세 품목이다. 김 위원장께서는 정통 엘리트 사회 고위층이신 만큼 모범 납세자이실 거라 생각한다. 고가 시계는 '고급 손목시계'라는 별도 특소세율이 적용된다. 관세청 홈페이지에서 세액 간편조회를 해볼 수 있다. 1967만원으로 적용하면 세액만 920만원 정도 나온다. 총 2887만원 정도 하는 시계가 되는 셈이다. 1994년 현대자동차 카탈로그에 인쇄된 그랜저 3.0 가격이 2590만원이다. 가격 이야기는 이정도로 충분할 거라 생각한다.


가격 이야기로 마무리하지만 나는 김 선생이 사치품을 쓴다고 비난하는 게 결코 아니다. 이른바 사회 지도층이라면 사실 다 돈 많고 많이 벌 수도 있잖아. 정정당당하게 벌고 품위 있게 있는 티 내면 그게 김종인이든 염따든 똑같이 멋지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정당함이지 물건 값이 아니다.


세상에는 정말 우수한 것이라는 게 있다. 우수한 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세속의 자원이 많이 들어간다. 귀한 소재, 고급 노동력, 세계 수준의 미감, 이런 걸 값싸게 구할 수는 없다. 좋은 사치품 하나 사서 오래 공들여 쓰는 것, 가끔 분에 넘치는 술을 마시고 그 향기를 오래 기억하는 것, 그런 게 모두 인생의 낭만이라고 생각한다. 김종인을 비롯해 넉넉한 분들이 좋은 물건을 소중히 여기는 건 보기 좋은 일이다. 


이걸 적으면서 여러 가지 재미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랑에 1과 김종인과 김종인의 다른 시계와 국회의원의 시계 등등 재미난 게 훨씬 더 많다…만 이미 분량이 너무 길어진데다+국회의원 시계를 누가 그리 궁금해하려나 싶어서 시계 이야기는 여기까지로 이만 줄인다. 혹시 김종인 측 관계자나 김종인 비대위원장 본인께서 이 게시물을 보신다면 앞으로도 좋은 시계 공들여 잘 즐겨 주시길 바란다. 


코비드-19 시대에도 여전히 랑에 1을 차고 계시는 김 비대위원장. 9월 2일 사진이었다. 앞으로도 좋은 시계 차고 열심히 일해주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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