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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용 Oct 06. 2020

고치고 다듬기

늘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연휴에는 집에 있던 것들을 고치고 다듬을 생각이었다. 새로 산 나무 쟁반과 오래된 구두를 손보려 했다. 


내가 처음 이사 왔을 때부터 그 자리에 있던 생활용품 가게가 있었다. 긴 연휴 사이의 어느 날 계단 세 개를 올라 들어가보았다. 매장은 한적했다. 조용하게 물건을 옮기는 직원들을 빼면 사람이 거의 없었고, 잠깐 들렀다 금방 자리를 비운 손님 말고 나처럼 오래 있던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사실은 오랜만에 구두를 닦으려니 구두약이 없어서 사러 나온 길에 가게에 들렀는데 막상 여기서 시간을 더 많이 보냈다. 


나무 쟁반 때문이었다. 아카시아나무로 만들었다는 원목 쟁반이 꽤 싼 가격에 나와 있었다. 이런 게 나이 드는 건지 내가 원체 그런 사람이었는지는 몰라도 원목의 결이 점점 좋아져서 그 쟁반을 한참 들고 바라보았다. 사자니 막상 쓸모 없을 것 같고, 안 사자니 가격 대비 재료의 질이나 만듦새가 좋고. 콘도 마리에의 시대에 아직도 이런 걸 고민하며 살다니. 그래도 별 수 없다. 내가 이런 사람인 걸 어떡해. 나무 쟁반이 상어 지느러미나 코끼리 상아처럼 현대의 기준에서 문제가 되는 상품도 아니고. 그냥 사왔다. 


살 때부터 조금 손을 보려 했다. 색의 톤이 처음부터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았고 표면도 조금 울퉁불퉁했다. 사포로 갈아서 표면을 정리하고 기름을 발라주면 나아질 것이었다. 집에 있던 사포로 북북 갈아 보았다. 나무가 튼튼해서 갈아 보니 생각보다 잘 갈리지 않았다. 고쳐 쓰는 일에도 생각보다 많은 품이 든다. 잘 안 갈리는 나무 쟁반을 갈고 있자니 몇 년 전의 어느 주말이 생각났다.


지금 사는 이 집에 처음 들어왔을 때도 여러 가지를 고쳐 썼다. 이 집에 처음 이사 왔을 때는 가구가 하나도 없었다. 예산은 빠듯했지만 아무거나 들이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거나 들이면 아무렇게나 살게 된다…같은 격언이라도 만들고 싶지만 그런 건 아니고, 가구나 소품은 애매한 걸 사도 은근히 튼튼하고 오래 간다. 다만 일상이 (의자 소리와 함께)조금씩 삐걱거리거나 (MDF 테이블의 상판처럼) 어딘가 서글픈 느낌으로 빛이 바랜다. 돈이 없더라도 그런 물건을 두고 싶지는 않았다. 빠듯한 예산에 물건을 갖추려면 낡거나 헐거나 어디 하나 문제가 있더라도 소재가 괜찮아 보이는 것들을 어떻게든 고쳐서 쓰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다행히 내겐 돈 대신 시간이 있었고, 혼자 살아 종종 적적한 대신 뭐라고 할 사람이 없었다.


지금 쓰는 책상을 그렇게 들였다. 집에서 10분쯤 걸어가면 나오는 재활용품 가게가 있었다. 그 재활용품 가게의 가장 구석진 곳에 다리가 풀린 채로 그 책상이 놓여 있었다. 조르고 졸라서 사장님에게 혼나가며 큰 책상 두 개를 4만원까지 깎아서 사왔다. 그것보다 비쌌어도 좀 난처할 책상이긴 했다. 책상 상판 두 개 모두에 낙서가 가득했고 다리에는 개가 물어뜯은 자국이 있었다. 장점은 딱 하나, 원목이라는 점이었다. 나는 그거면 충분했다. 그 책상을 다시 잘 써보기 위해 책상 표면을 하염없이 사포로 갈았다. 그때 쓰던 사포가 아직 집 한 켠에 남아 있던 것이었다. 


오랜만에 그 사포로 쟁반 표면을 밀었다. 그러다 보니 옛날 생각도 나고. 재활용품 가게는 얼마 가지 않아 없어졌다. 그래서 그 앞을 지날 때마다 '그때 내가 너무 깎아달라고 해서 없어졌나...' 라는 죄책감을 잠깐씩 느끼곤 했다. 내가 사포를 샀던 철물점도 이제는 카페가 되었다. 그런 게 도시 생활이겠지. 


내 동네의 업종이 변하는 동안 나도 고쳐 쓰는 일에 조금씩 더 익숙해졌다. 낡은 나무를 다듬는 방법은 사포질 말고도 더 있었다. 역시 중고로 산 티크 테이블과 쟁반과 접시와 코스터에는 기름을 발랐다. 나무가 점점 푸석푸석해지는 느낌이 들어 기름을 발라주어야 하나 싶었다. 혹시 기름을 바르는 방법 같은 것도 따로 있나 싶어서 잠깐 찾아보았더니 역시나 따로 있었다. 유튜브에 엄청 많이 올라와 있었다. 나라고 못할 거 있나. 시간을 들여 준비물을 준비하고 날을 잡아 슬슬 닦아 주었다. 


해보니 나무에 기름 발라주는 일은 사람의 그루밍과 비슷했다. 비누로 얼굴의 기름기를 닦아내고 깨끗하게 씻어준 후 로션을 발라주듯, 나무도 스틸 울에 테레핀유를 발라서 나무에 묻어 있던 먼지와 찌든 기름을 닦아낸다. 테레핀유를 발라 다 닦아둔 나무는 기름기가 쏙 빠져 있어서 계속 그렇게 두면 로션 바르지 않은 피부처럼 갈라질 것 같다. 깨끗해진 나무에 기름을 발라주면 다시 기분 좋게 반질반질해진다. 이럴 때 쓰는 티크 오일이란 것도 따로 있다. 자본주의란 대단하군요. 그것도 미리 사놨다. 나중에 알고 보니 표면에 발라주는 건 기름이면 다 된다고 한다. 올리브유를 바르신다는 분도 있었는데 알았더라면 나도 그런 기름을 썼을 것 같다. 티크 오일은 냄새가 그다지 좋지 않다. 


나무를 다듬어 쓰는 건 시간이 걸리고 지루한 일이다. 사포를 쓰면 가루가 날린다. 테레핀유니 스틸 울이니 티크 오일 같은 건 쉽게 살 수 없기 때문에 미리 준비도 해둬야 한다. 무엇보다 이 과정의 대부분은 될 때까지 그냥 해야 하는 일이다. 표면을 갈아낸다. 부드러워질 때까지. 갈고 나면 씻고, 씻고 나면 발라준다. 처음에야 좀 재미있을 수도 있지만 하다 보면 점점 ‘언제 끝나지’ 이걸 왜 했지’ 같은 생각이 더 많이 든다. 


그래도 시작했다면 별 수 없다. 주변에는 톱밥이 점점 쌓여 가고 기름도 다 사 놨는데 안 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렇게 몇 번 고쳐 쓰다 보니 하고 나면 분명히 뭔가가 나아져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그 사실을 아니까 계속 뭔가를 고쳐 써볼까 싶은 것 같기도 하다. 다른 걸 고칠 때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쇠든 옷이든 오래된 차든. 처음에는 지루하다가 마지막에 다 되면 좋겠지. ‘비포어 & 애프터’ 영상이 인기를 끄는 이유도 비슷한 개념 아닐까. 


나무를 다듬는 틈틈이 원고도 고쳤다. 내년에 나오기로 한 책이 하나 있다. 뭐든 상품이 완성되려면 여러 가지 일들이 있는데 지금 나올 책도 내게는 그런 느낌이다. 몇 년 동안 몇 가지 변수를 겪고 몇 가지 변화를 거쳐 몇 달 전 초고를 거의 다 마쳤다. 그걸 읽은 담당 편집자께서 좋은 피드백을 주셨고, 그 피드백에 맞춰서 원고를 고치는 중이다. 손을 대야 할 부분들이 좀 있긴 해도 고치는 게 훨씬 낫다. 정확히 말하기는 좀 그렇고 전반적인 구성에는 변화가 없지만 세세한 부분들을 세세하게 다듬고 있다.


원고 고치기도 나무 쟁반에 사포질하는 것과 내게는 크게 다를 바 없다. 단순 작업과 비슷한 면이 있고, 하기 전에는 별 거 아닐 것 같다가 막상 하면 언제 하나 싶고, 그래서 하다 보면 집중력을 잃어서 한번씩 졸기도 한다. 그래도 톱밥이 튀거나 손에 기름이 묻지는 않아서 다행이다 싶기도 하고. 그러다가 <가짜 사나이>같은 거 보면 내 고충이야 아무것도 아니다 싶어지기도 한다. 원고를 적다가 거품을 물거나 하지는 않으니까.


이렇게 적어두면 나무 쟁반과 글을 번갈아 고치며 연휴를 성실하게 보낸 것 같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러지 못했다. 면도하지 않은 중년의 모습으로 늘어지기도 늘어지고 늦잠도 아주 많이 잤다. 나무와 원고가 그렇듯 내 스스로에 대해서도 조금씩은 고쳐 왔다고 생각했는데 곤란할 정도로 잠이 많은 건 아직 다 못 고치겠다. 구두를 닦겠다고 구두약을 샀는데 막상 구두에는 손도 못 댔다. 이번 주 안에 나무를 다 다듬고 주말에 구두를 닦고 싶지만 그럴 수 있으려나.


그나저나 집에 나무로 된 것 몇 개를 두는 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냥 무늬를 보든 만지작거리든, 그러다 보면 그날의 기분에 따라 아무 생각이 없어지기도 하고 여러 가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며칠 전에 읽은 <스타인웨이 만들기>에도 훌륭한 구절이 있었다. "나무를 보고 피아노를 상상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그러게 말이다. 나무가 쟁반도 되고 피아노도 된다고 생각하면 뭔가 아득한 기분이 든다.



헤더 이미지를 계속 찾고 있다. 내가 찍은 걸 올려도 상관은 없지만 왠지 내키지 않는다. 이참에 저작권에서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이미지를 찾는 재미도 있고. 오늘 이미지는 미국 의회 도서관에서 공개한 무료 이미지 중 하나다. 미국 의회 도서관은 상당히 많은 고화질 이미지를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궁금하시거나 필요하신 분을 위해 링크 남겨 둔다. 빈티지 포스터를 무료로 제공하는 프리 클래식 이미지 닷컴 도 있다. 


+각종 사연이나 질문에도 늘 열려 있습니다. iaminseoul@gmail.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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